가해자가 '끝났다'고 말해선 안 된다 경고한 문재인 [문재인의 말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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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2 08:17
[문재인의 말과 글] 일본에 사과와 반성 촉구... 두 가지 원칙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들어서만 한일 정상회담을 7번 했다. 산술적으로 7주에 한 번꼴로 만난 셈이다. 이 정도면 막역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양 정상은 매우 흡족해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정반대였다. 일본과는 재임 기간 내내 불화했다. 악연이다. 왜 그랬을까. 문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이전 정부가 남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게 대체로 일본과 부딪힐 경로에 서 있었다.
정부 출범 이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화해·치유재단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재단은 복잡한 운명을 타고났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부 장관 회담이 열렸다. 두 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기자회견장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발표했다. 대독(代讀) 사과다.
양국 합의에 따라 피해자 지원 재단을 한국 정부가 설립기로 했다. 일본은 10억 엔을 출연했다. 일본은 '진정한' 사과나 국가의 법적 책임에는 고개를 저었다.
2016년 1월 12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당 의원이 아베 총리에게 직접 사과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아베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과를) 말했다. 같은 문제를 2년, 3년 뒤에도 말하라고 요구하면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책임을 갖고 이 문제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종결'에 위배 되기 때문에 직접 사과를 거부한다는, 기묘한 논리다. 계기만 있으면 사과하는 독일과 천양지차다.
2016년 10월 3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총리 명의로 사죄 편지를 보내겠느냐"라는 질의가 나왔다. 아베 총리는 "합의 밖의 내용이다. 우리 정부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다.
그 사이 2016년 7월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됐다. 피해자 할머니들은 분노했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 출연금 반환과 재단 해산을 요구했다.
과거를 묻은 채 미래로 갈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문 대통령은 양국 합의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조사를 지시했다. 외교부는 2017년 7월 31일 장관 직속으로 한일 위안부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다. 여성가족부도 화해·치유재단 운영 실태를 점검했다.
TF는 다섯 달 동안 활동했다. 12월 27일 결과를 발표했다. TF는 전시 여성 인권에 관한 국제사회 규범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피해자 중심 접근'이 한일 협의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루 뒤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도 발표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조용하고 신속하게 설립을 추진하라"고 지시했고, 외교부와 함께 민관 태스크포스를 꾸려 재단 설립을 지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단은 할머니들을 회유했다. 김태현 화해치유재단 이사장은 이런 말까지 했다. "받을 건 받아야죠. 할머님 받으셔야죠. 돌아가시고 난 다음엔 해주지도 않아요.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저는 받을 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가족부는 재단 해산이 답이라는 결론을 냈다. 장관 직권으로 해산 절차를 밟았다.
정세가 복잡해졌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 합의와 관련, "1미리(㎜)도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2017년 12월 28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보도다.
문재인 대통령은 두 가지 원칙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잘못했으면 사과하고 손해를 문다. 과거를 묻은 채 미래로 갈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튿날 아베 총리와 통화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민간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 정부가 해결하는 건 한계가 있어 시간이 필요하다. 국민 정서와 현실을 인정하면서 양측이 공동으로 노력하자"라고 말했다. 통성명하는 날이었다. 불편한 관계가 되더라도 국민이 보기에 잘못된 점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두 달 뒤인 7월 7일 문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대좌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때다. 문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더 가깝지 못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양국이 공동으로 노력해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자"라고 말했다. 일본 처지를 고려해 '무엇'이라고 표현했다. 누구나 아는 그 무엇 말이다.
'한일 관계를 일본 자국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한 달 뒤 8월 15일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원칙을 재천명했다.
"우리가 한일 관계의 미래를 중시한다고 해서 역사 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 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을 때 양국 간 신뢰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동안 일본의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양국 간의 과거와 일본의 책임을 직시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 노력이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에 기여해 왔습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이 일본의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일 관계의 걸림돌은 과거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 문제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인식 부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 등 한일 간 역사 문제 해결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민적 합의에 의한 피해자 명예 회복과 보상,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 약속이라는 국제사회의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 원칙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일본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경고다. '한일 관계를 일본 자국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일본은 집권 세력이 바뀔 때마다 안면을 바꿔왔다.
위안부 TF 조사 결과가 나온 뒤 문 대통령은 2017년 12월 28일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렸다. 그는 "지난 합의가 양국 정상의 추인을 거친 정부 간 공식적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함께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라고 밝혔다.
2018년 제99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취임 후 첫 3·1절이었다. 문 대통령은 그때까지 일본과 겪은 갈등을 종합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우리의 힘으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강점당한 우리 땅입니다. 우리 고유의 영토입니다. 지금 일본이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끝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 시기에 있었던 반(反)인륜적 인권 범죄 행위는 끝났다는 말로 덮어지지 않습니다. 불행한 역사일수록 그 역사를 기억하고 그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입니다. 일본은 인류 보편의 양심으로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일본이 고통을 가한 이웃 나라들과 진정으로 화해하고 평화공존과 번영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일본에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답게 진실한 반성과 화해 위에서 함께 미래로 나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사법부는 법적으로 판단했고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다"
위안부 못지않은 의제가 튀어나왔다.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 손해배상 재판이다. 강제로 끌려가 일하고 임금을 받지 못한 한국인 피해자들이 있다. 이들은 2005년 한국과 일본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일본 재판에서는 졌다.
한국 1, 2심 법원은 일본과 같은 판단을 했다. '일본 판결 내용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과 기타 사회질서에 비춰 허용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일본 확정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효력이 인정된다'라고 했다. 피해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재판부냐"라고 가슴을 쳤다.
대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2012년 5월 24일 원심을 깨고 2심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충돌한다. 이런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된다"라고 밝혔다. 이어 "1965년 6월 한일 양국이 체결한 청구권 협정에 따라 개인 청구권도 소멸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강제 동원 등 불법 행위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다뤄지지 않았으므로 배상 책임은 일본 정부와 기업에 있다"라고 판단했다.
피고 기업 구(舊) 신일철주금도 상고했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상고를 기각했다. 일본 기업이 한국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주라는 원심판결이 확정됐다.
일본 반발은 전례 없이 거셌다. 한국 대법원판결이 청구권 협정 위반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에 시정하라고 압박했다. 아베 총리는 그해 11월 1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했다. 그는 "구(舊) 조선 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징용공'이라는 표현이 아닌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있다. 국제재판을 포함해 모든 선택지를 시야에 두고 의연한 대응을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노역이 강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당한 이들에게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고노 다로 외무상은 더 나아갔다. 외교 책임자가 아니라 선전포고 직전 국방 각료인 양 험한 말을 쏟아냈다. 11월 6일 한국 대법원판결을 "폭거이자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며 "한국 측이 적절하게 대응할 것으로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취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 번 "따박따박 대응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문했다. 따박따박은 문 대통령이 자주 쓰는 부사다. 반듯하고 또렷하다는 '또박또박'의 부산 사투리다.
문 대통령은 일본 인식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봤다. 재판부 판단을 정부가 뒤집으라는 요구는 '삼권 분립'에 반한다는 것이다. 11월 7일 티타임에서 "사법부 판결은 외교가 아니다. 사법부는 법적으로 판단했고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게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판결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직업적 알맹이는 인권 변호사니까.
"사법부 판단은 한일 협정 효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근간을 해석하면서 적용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나, 한국인 피해자, 강제 징용해 불법 행위를 가한 일본 기업의 배상 효력이 미치나를 판단했다. 피고가 일본 기업이라서 (일본이) 이런저런 논평을 말할 수는 있으나 외교적 대응은 현명하지 못하다. 우리가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
이후에 이낙연 총리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유감을 표명했다. 일본에 자제를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1월 12일 티타임에서도 "법률가 입장에서 봐도 국가가 개인 위임을 받지 않으면 대통령이라도 개인 고유 권리를 소멸시킬 권리가 없다. 그러려면 국민적 동의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문제가 양 국민의 적대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신중하고 절제된 표현이 필요하다. 양국 간 우호 정서를 해치는 것은 한일 미래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내준 만큼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것은 무엇인가
공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은 어떻게 했을까. 공세 강도를 높여갔다. 도발하듯 했다.
내가 청와대 있는 동안만 일본은 역사 교과서에 세 차례 손을 댔다. 2017년 6월, 이듬해 3월과 7월 초중고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고쳤다.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썼다. 위안부 피해자 및 강제 징용 사안은 불명확하게 기술하거나 강제성을 희석했다.
독도 문제에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한국 방문 때다. 독도 새우를 넣은 복주머니 잡채가 만찬 메뉴에 포함됐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때 남북이 함께 입장하며 독도가 새겨진 한반도기를 들 예정이었다. 그때마다 일본은 강하게 항의했다.
2018년 10월 11일 제주에서 열리는 해군 국제관함식 행사에 일본은 욱일기를 단 해상자위대 함정을 보내기로 했다. 관함식은 군 통수권자가 군함 전투태세와 장병 군기를 검열하는 사열 의식이다. 욱일기는 피해국가에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한다. 국내에서 욱일기 게양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국 정부가 욱일기 교체를 요구하자 아예 행사에 불참했다.
또 한국 해군 함정에 일본 초계기가 위협하듯 바짝 붙어 비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2019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네 차례나.
새 정부 출범 이후 한일 간에 부글부글 끓던 문제는 잠잠해졌다. 강제노역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 초계기 갈등 봉합 등 국민 의사는 묻지 않고 정부 간 의견이 교환됐다. 정확한 대차대조표는 시간이 흐른 뒤에 확인할 수 있을 터.
"대한민국은 호혜·평등의 원칙 하에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 대한민국의 대외 정책은 평화 선린에 그 기본을 두고 있으며, 우방들과의 기존 유대 관계는 이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갈 것임을 재천명한다."
누가 한 말일까. 보수가 자랑스러워하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는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그의 말대로 외교의 기본은 선린, 호혜와 평등이다. 현재 일본과 선린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호혜와 평등도 실현되고 있나. 우리가 내준 만큼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것은 무엇인가.
▲ 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한 회담을 하고 있다. |
ⓒ 공동취재사진 |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들어서만 한일 정상회담을 7번 했다. 산술적으로 7주에 한 번꼴로 만난 셈이다. 이 정도면 막역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양 정상은 매우 흡족해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정반대였다. 일본과는 재임 기간 내내 불화했다. 악연이다. 왜 그랬을까. 문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이전 정부가 남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게 대체로 일본과 부딪힐 경로에 서 있었다.
정부 출범 이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화해·치유재단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재단은 복잡한 운명을 타고났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부 장관 회담이 열렸다. 두 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기자회견장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발표했다. 대독(代讀) 사과다.
양국 합의에 따라 피해자 지원 재단을 한국 정부가 설립기로 했다. 일본은 10억 엔을 출연했다. 일본은 '진정한' 사과나 국가의 법적 책임에는 고개를 저었다.
2016년 1월 12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당 의원이 아베 총리에게 직접 사과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아베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과를) 말했다. 같은 문제를 2년, 3년 뒤에도 말하라고 요구하면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책임을 갖고 이 문제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종결'에 위배 되기 때문에 직접 사과를 거부한다는, 기묘한 논리다. 계기만 있으면 사과하는 독일과 천양지차다.
2016년 10월 3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총리 명의로 사죄 편지를 보내겠느냐"라는 질의가 나왔다. 아베 총리는 "합의 밖의 내용이다. 우리 정부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다.
그 사이 2016년 7월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됐다. 피해자 할머니들은 분노했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 출연금 반환과 재단 해산을 요구했다.
과거를 묻은 채 미래로 갈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문 대통령은 양국 합의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조사를 지시했다. 외교부는 2017년 7월 31일 장관 직속으로 한일 위안부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다. 여성가족부도 화해·치유재단 운영 실태를 점검했다.
TF는 다섯 달 동안 활동했다. 12월 27일 결과를 발표했다. TF는 전시 여성 인권에 관한 국제사회 규범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피해자 중심 접근'이 한일 협의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루 뒤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도 발표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조용하고 신속하게 설립을 추진하라"고 지시했고, 외교부와 함께 민관 태스크포스를 꾸려 재단 설립을 지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단은 할머니들을 회유했다. 김태현 화해치유재단 이사장은 이런 말까지 했다. "받을 건 받아야죠. 할머님 받으셔야죠. 돌아가시고 난 다음엔 해주지도 않아요.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저는 받을 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가족부는 재단 해산이 답이라는 결론을 냈다. 장관 직권으로 해산 절차를 밟았다.
정세가 복잡해졌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 합의와 관련, "1미리(㎜)도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2017년 12월 28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보도다.
문재인 대통령은 두 가지 원칙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잘못했으면 사과하고 손해를 문다. 과거를 묻은 채 미래로 갈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튿날 아베 총리와 통화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민간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 정부가 해결하는 건 한계가 있어 시간이 필요하다. 국민 정서와 현실을 인정하면서 양측이 공동으로 노력하자"라고 말했다. 통성명하는 날이었다. 불편한 관계가 되더라도 국민이 보기에 잘못된 점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두 달 뒤인 7월 7일 문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대좌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때다. 문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더 가깝지 못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양국이 공동으로 노력해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자"라고 말했다. 일본 처지를 고려해 '무엇'이라고 표현했다. 누구나 아는 그 무엇 말이다.
'한일 관계를 일본 자국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 2017년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한 달 뒤 8월 15일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원칙을 재천명했다.
"우리가 한일 관계의 미래를 중시한다고 해서 역사 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 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을 때 양국 간 신뢰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동안 일본의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양국 간의 과거와 일본의 책임을 직시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 노력이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에 기여해 왔습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이 일본의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일 관계의 걸림돌은 과거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 문제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인식 부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 등 한일 간 역사 문제 해결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민적 합의에 의한 피해자 명예 회복과 보상,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 약속이라는 국제사회의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 원칙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일본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경고다. '한일 관계를 일본 자국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일본은 집권 세력이 바뀔 때마다 안면을 바꿔왔다.
위안부 TF 조사 결과가 나온 뒤 문 대통령은 2017년 12월 28일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렸다. 그는 "지난 합의가 양국 정상의 추인을 거친 정부 간 공식적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함께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라고 밝혔다.
2018년 제99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취임 후 첫 3·1절이었다. 문 대통령은 그때까지 일본과 겪은 갈등을 종합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우리의 힘으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강점당한 우리 땅입니다. 우리 고유의 영토입니다. 지금 일본이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끝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 시기에 있었던 반(反)인륜적 인권 범죄 행위는 끝났다는 말로 덮어지지 않습니다. 불행한 역사일수록 그 역사를 기억하고 그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입니다. 일본은 인류 보편의 양심으로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일본이 고통을 가한 이웃 나라들과 진정으로 화해하고 평화공존과 번영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일본에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답게 진실한 반성과 화해 위에서 함께 미래로 나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사법부는 법적으로 판단했고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다"
위안부 못지않은 의제가 튀어나왔다.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 손해배상 재판이다. 강제로 끌려가 일하고 임금을 받지 못한 한국인 피해자들이 있다. 이들은 2005년 한국과 일본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일본 재판에서는 졌다.
한국 1, 2심 법원은 일본과 같은 판단을 했다. '일본 판결 내용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과 기타 사회질서에 비춰 허용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일본 확정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효력이 인정된다'라고 했다. 피해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재판부냐"라고 가슴을 쳤다.
대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2012년 5월 24일 원심을 깨고 2심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충돌한다. 이런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된다"라고 밝혔다. 이어 "1965년 6월 한일 양국이 체결한 청구권 협정에 따라 개인 청구권도 소멸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강제 동원 등 불법 행위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다뤄지지 않았으므로 배상 책임은 일본 정부와 기업에 있다"라고 판단했다.
피고 기업 구(舊) 신일철주금도 상고했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상고를 기각했다. 일본 기업이 한국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주라는 원심판결이 확정됐다.
일본 반발은 전례 없이 거셌다. 한국 대법원판결이 청구권 협정 위반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에 시정하라고 압박했다. 아베 총리는 그해 11월 1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했다. 그는 "구(舊) 조선 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징용공'이라는 표현이 아닌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있다. 국제재판을 포함해 모든 선택지를 시야에 두고 의연한 대응을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노역이 강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당한 이들에게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고노 다로 외무상은 더 나아갔다. 외교 책임자가 아니라 선전포고 직전 국방 각료인 양 험한 말을 쏟아냈다. 11월 6일 한국 대법원판결을 "폭거이자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며 "한국 측이 적절하게 대응할 것으로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취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 번 "따박따박 대응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문했다. 따박따박은 문 대통령이 자주 쓰는 부사다. 반듯하고 또렷하다는 '또박또박'의 부산 사투리다.
문 대통령은 일본 인식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봤다. 재판부 판단을 정부가 뒤집으라는 요구는 '삼권 분립'에 반한다는 것이다. 11월 7일 티타임에서 "사법부 판결은 외교가 아니다. 사법부는 법적으로 판단했고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게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판결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직업적 알맹이는 인권 변호사니까.
"사법부 판단은 한일 협정 효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근간을 해석하면서 적용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나, 한국인 피해자, 강제 징용해 불법 행위를 가한 일본 기업의 배상 효력이 미치나를 판단했다. 피고가 일본 기업이라서 (일본이) 이런저런 논평을 말할 수는 있으나 외교적 대응은 현명하지 못하다. 우리가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
이후에 이낙연 총리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유감을 표명했다. 일본에 자제를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1월 12일 티타임에서도 "법률가 입장에서 봐도 국가가 개인 위임을 받지 않으면 대통령이라도 개인 고유 권리를 소멸시킬 권리가 없다. 그러려면 국민적 동의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문제가 양 국민의 적대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신중하고 절제된 표현이 필요하다. 양국 간 우호 정서를 해치는 것은 한일 미래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내준 만큼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것은 무엇인가
▲ 지난 3월 11일 서울광장에서 강제동원 굴욕해법 강행 규탄!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2차 범국민대회가 열리고 있다. |
ⓒ 이희훈 |
공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은 어떻게 했을까. 공세 강도를 높여갔다. 도발하듯 했다.
내가 청와대 있는 동안만 일본은 역사 교과서에 세 차례 손을 댔다. 2017년 6월, 이듬해 3월과 7월 초중고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고쳤다.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썼다. 위안부 피해자 및 강제 징용 사안은 불명확하게 기술하거나 강제성을 희석했다.
독도 문제에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한국 방문 때다. 독도 새우를 넣은 복주머니 잡채가 만찬 메뉴에 포함됐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때 남북이 함께 입장하며 독도가 새겨진 한반도기를 들 예정이었다. 그때마다 일본은 강하게 항의했다.
2018년 10월 11일 제주에서 열리는 해군 국제관함식 행사에 일본은 욱일기를 단 해상자위대 함정을 보내기로 했다. 관함식은 군 통수권자가 군함 전투태세와 장병 군기를 검열하는 사열 의식이다. 욱일기는 피해국가에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한다. 국내에서 욱일기 게양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국 정부가 욱일기 교체를 요구하자 아예 행사에 불참했다.
또 한국 해군 함정에 일본 초계기가 위협하듯 바짝 붙어 비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2019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네 차례나.
새 정부 출범 이후 한일 간에 부글부글 끓던 문제는 잠잠해졌다. 강제노역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 초계기 갈등 봉합 등 국민 의사는 묻지 않고 정부 간 의견이 교환됐다. 정확한 대차대조표는 시간이 흐른 뒤에 확인할 수 있을 터.
"대한민국은 호혜·평등의 원칙 하에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 대한민국의 대외 정책은 평화 선린에 그 기본을 두고 있으며, 우방들과의 기존 유대 관계는 이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갈 것임을 재천명한다."
누가 한 말일까. 보수가 자랑스러워하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는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그의 말대로 외교의 기본은 선린, 호혜와 평등이다. 현재 일본과 선린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호혜와 평등도 실현되고 있나. 우리가 내준 만큼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