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친형의 특이한 이력... 왜 '독립유공자'가 아니란 말인가 [김종성의 '히,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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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8 21:49
[독립운동가외전] 일제와 미군정에 맞서 싸웠던 박상희
1927년 신간회 결성은 좌우합작 민족주의운동의 대표적 사례다. 애초의 명칭은 신간회(新幹會)가 아니라 신한회(新韓會)였다.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이 서울시와 함께 2017년 12월 7일 개최한 '민주공화정 100년 심포지엄'에 제출된 최형익 한신대 교수의 발표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새로운 민족단일 정치조직의 명칭은 대한제국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신한회로 정했다. 하지만 일제 총독부가 그 이름으로는 허가를 해줄 수 없다고 하여 문제가 생겼다. 동지들이 다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결국 홍명희가 제안한 신간회로 낙착이 되었다."
한(韓)자와 간(幹)자가 동일한 의미로 통용된 점 등이 이 결정의 배경이 됐다고 발표문은 말한다. 신한회가 아닌 신간회가 된 이 단체의 좌우합작은 학생들을 하나로 묶는 데도 기여했다. 이화민주동우회가 펴낸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운동사>는 "신간회가 만들어지자 학생운동 진영에서도 신간회 학생부를 조직해서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학생회와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신간회 학생부 내에서 서로 협력했다"고 기술한다.
신간회는 한국 민중을 일제 억압으로부터 보호하는 데도 기여했다. 전태일재단 이사를 지낸 이원보 전 중앙노동위원장의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은 "1927년 영흥 총파업은 광산의 일본인 기사들이 조선인 우차부(소달구지를 끄는 사람들)를 구타해 중상을 입힌 데서 발단"했다며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이에 항의했고 영흥청년동맹과 신간회가 이를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설명한다.
신간회 선산지부의 핵심, 박상희
이런 신간회의 경북 선산지부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다. 박상희는 20대 초반일 때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이 일에 참여했다. 1927년 8월 30일 자 <조선일보> 기사 '경북 선산에 신간 준비'는 7월 26일 오후 4시 구미 금창여관 2층에서 신간회 선산지회 설립준비위원회 모임이 있었다면서 준비위원 10명 중 하나로 박상희를 거명했다.
9월 2일의 준비위원회 제2차 회의를 보도한 그해 9월 5일 자 기사는 구미 김원용 자택에서 열린 이 회합 때 "박상희 씨의 간단한 경과보고"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경과보고자로 나설 만큼, 준비위원회 결성 과정에 초기부터 적극 개입했던 것이다.
그의 경과보고 뒤에 이재기 의장 주재로 6개 항이 토의됐다. 그중 다섯 번째는 장인달·김수호와 더불어 박상희를 상무위원으로 선출하는 안건이었다. 국내 최대 민족운동단체의 선산지부 3인 상무위원 중 하나로 뽑혔으니, 20대 초반의 박상희가 지역유지급 대우를 받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 해에 박정희는 열 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 홈페이지에 게재된 <나의 일기>는 "어머니는 나의 셋째 형 상희씨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키셨다"라며 "그 당시 이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상희 형 하나뿐이었다"고 말한다.
유관순을 비롯한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1919년 3·1운동에 대거 가담한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초등학교인 보통학교 졸업은 괜찮은 학력이지만 높은 학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상희가 입학한 1920년 무렵 그 마을에 보통학교 학생이 하나뿐이었다고 하니, 20대 초반의 박상희가 1927년에 지역유지 반열에 들어서는 일이 어렵지 않았으리라 볼 수 있다. 그의 생애 내내 관찰되는 불굴의 항일정신을 감안하면 지역 원로들이 그의 추진력을 어떻게 평가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박상희에 대해 일제는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다. 유력 언론에서 그의 민족주의 활동이 상세히 보도됐으니 일제 경찰이 주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해 11월 초순, 그는 경북경찰부 고등과 형사 세 명에게 체포됐다. 그달 <조선일보>의 14일 자 기사 '경북경찰부원 돌연 신간회원 검거'는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박상희 총무간사와 윤재우·김정술 회원이 체포됐다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삼씨(三氏)를 검거한 후에 신간지회 사무실과 전긔(前記) 삼씨의 집을 수색한 후에 지난 십일 오후 대구로 압송하야 대구서(大邱署) 류치장에다가 류치한 후에 방금 극비밀리에서 엄중 취됴하는 중인 바"
3명이 검거된 사실을 기술한 다음에, 앞에 기록된 세 사람의 집과 신간회 사무실이 압수수색 당한 사실을 전했다. 경북 경찰이 박상희를 신간회 지부의 실질적 핵심 인물로 봤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다.
박상희는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족주의운동에 가속도를 붙여 나갔다. 위 사건으로 검거됐다가 풀려난 지 얼마 안 되는 12월 15일에는 선산군 청년동맹 창립준비위원회 현장에 등장했다. 그달 20일 자 <동아일보> 기사 '청년동맹 준비'는 선산군 청년들이 "통일적이며 목적의식적으로 전민족 정치투쟁"을 전개하고자 신간회 선산지회 회관에서 청년동맹 준비위원회 모임을 개최한 일을 전하면서 "박상희 군의 간략한 개회사"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박상희는 일제 경찰에 수시로 붙들렸다. 1928년 7월 28일 자 <동아일보>에도 그가 경북경찰부에 검거되고 그의 집이 압수수색 받은 일이 보도됐다. 이 기사는 그의 혐의점이 극비에 부쳐졌다고 덧붙였다. 그해 11월 11일 자 <조선일보>에도 선산경찰서에 검거된 사실이 실렸다. 1931년 4월 2일 자 <동아일보>에는 <우리의 전술>이란 팸플릿을 우편으로 받았다가 선산경찰서 구미주재소에 압수된 사실이 보도됐다.
20대 초반부터 집요한 감시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는 끝끝내 뜻을 이어갔다. 40세 때인 1945년 해방 직후에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구미지부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념이 변치 않고 유지됐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미군정에 맞서 일어섰다(대구 10월항쟁). 미군정이 친일청산을 훼방하며 친일파를 재기용하고, 부실한 경제정책으로 한국인들을 굶주리게 하고, 민족통합의 가능성을 점점 희박하게 만드는 데 대한 울분과 저항의 표시였다. 그에게 10월 항쟁은 독립투쟁의 연장이었다.
미군정에 대항했던 독립운동가, 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이 투쟁에서 그가 얼마나 열렬히 투쟁했는지는, 대구 항쟁을 '대구 폭동'으로 부르고 항쟁의 핵심 구호인 친일청산 요구를 빠트린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 같은 데서도 확인된다. 이 책은 "10월 1일 대구에서 좌익들이 '쌀 배급·일급제 반대·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동을 일으키고, 미군정에 의해 대구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폭동은 주변 농촌 지역으로 광역화됐다"고 한 뒤 이렇게 서술한다.
"이 과정에서 선산군 민전(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조직) 사무국장 겸 선산인민위원회 내무부장이던 박상희는 2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적기가를 부르면서 선산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박상희는 이 과정에서 인간적 포용력을 발휘하여 군중의 폭도화를 방지함으로써 우익 유지들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충청도에서 지원 나온 경찰 병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대구 10월항쟁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박정희의 형은 일제강점기 경력만으로도 대한민국 정부의 독립유공자로 대우 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박상희라는 이름은 독립유공자 1만 7848명 명단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좌파로 불린 진보진영의 일원이었고, 목숨을 걸고 미군정에 대항했다. 기득권층이 터부시할 만한 요인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명명백백한 독립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 않으면, 한국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서술될 수 없게 된다. 이런 인물을 독립운동가 외전(外傳)이 아닌 독립운동가 열전 혹은 본전(本傳)에 올려놓는 국민적 노력이 필요하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를 계기로 윤석열 정권은 국내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보다 대구·경북이라는 확실한 지역구를 둔 박정희에 좀더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차제에 윤석열 정권도 박정희뿐 아니라 그의 형 박상희에도 관심을 가져 박상희 서훈에 협력할 필요가 있다.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있는 신간회 강령과 규약(복제본) |
ⓒ 연합뉴스 |
1927년 신간회 결성은 좌우합작 민족주의운동의 대표적 사례다. 애초의 명칭은 신간회(新幹會)가 아니라 신한회(新韓會)였다.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이 서울시와 함께 2017년 12월 7일 개최한 '민주공화정 100년 심포지엄'에 제출된 최형익 한신대 교수의 발표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새로운 민족단일 정치조직의 명칭은 대한제국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신한회로 정했다. 하지만 일제 총독부가 그 이름으로는 허가를 해줄 수 없다고 하여 문제가 생겼다. 동지들이 다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결국 홍명희가 제안한 신간회로 낙착이 되었다."
한(韓)자와 간(幹)자가 동일한 의미로 통용된 점 등이 이 결정의 배경이 됐다고 발표문은 말한다. 신한회가 아닌 신간회가 된 이 단체의 좌우합작은 학생들을 하나로 묶는 데도 기여했다. 이화민주동우회가 펴낸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운동사>는 "신간회가 만들어지자 학생운동 진영에서도 신간회 학생부를 조직해서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학생회와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신간회 학생부 내에서 서로 협력했다"고 기술한다.
신간회는 한국 민중을 일제 억압으로부터 보호하는 데도 기여했다. 전태일재단 이사를 지낸 이원보 전 중앙노동위원장의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은 "1927년 영흥 총파업은 광산의 일본인 기사들이 조선인 우차부(소달구지를 끄는 사람들)를 구타해 중상을 입힌 데서 발단"했다며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이에 항의했고 영흥청년동맹과 신간회가 이를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설명한다.
신간회 선산지부의 핵심, 박상희
▲ 독립운동가 박상희 |
ⓒ 위키미디어 공용 |
이런 신간회의 경북 선산지부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다. 박상희는 20대 초반일 때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이 일에 참여했다. 1927년 8월 30일 자 <조선일보> 기사 '경북 선산에 신간 준비'는 7월 26일 오후 4시 구미 금창여관 2층에서 신간회 선산지회 설립준비위원회 모임이 있었다면서 준비위원 10명 중 하나로 박상희를 거명했다.
9월 2일의 준비위원회 제2차 회의를 보도한 그해 9월 5일 자 기사는 구미 김원용 자택에서 열린 이 회합 때 "박상희 씨의 간단한 경과보고"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경과보고자로 나설 만큼, 준비위원회 결성 과정에 초기부터 적극 개입했던 것이다.
그의 경과보고 뒤에 이재기 의장 주재로 6개 항이 토의됐다. 그중 다섯 번째는 장인달·김수호와 더불어 박상희를 상무위원으로 선출하는 안건이었다. 국내 최대 민족운동단체의 선산지부 3인 상무위원 중 하나로 뽑혔으니, 20대 초반의 박상희가 지역유지급 대우를 받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 해에 박정희는 열 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 홈페이지에 게재된 <나의 일기>는 "어머니는 나의 셋째 형 상희씨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키셨다"라며 "그 당시 이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상희 형 하나뿐이었다"고 말한다.
유관순을 비롯한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1919년 3·1운동에 대거 가담한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초등학교인 보통학교 졸업은 괜찮은 학력이지만 높은 학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상희가 입학한 1920년 무렵 그 마을에 보통학교 학생이 하나뿐이었다고 하니, 20대 초반의 박상희가 1927년에 지역유지 반열에 들어서는 일이 어렵지 않았으리라 볼 수 있다. 그의 생애 내내 관찰되는 불굴의 항일정신을 감안하면 지역 원로들이 그의 추진력을 어떻게 평가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박상희에 대해 일제는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다. 유력 언론에서 그의 민족주의 활동이 상세히 보도됐으니 일제 경찰이 주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해 11월 초순, 그는 경북경찰부 고등과 형사 세 명에게 체포됐다. 그달 <조선일보>의 14일 자 기사 '경북경찰부원 돌연 신간회원 검거'는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박상희 총무간사와 윤재우·김정술 회원이 체포됐다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삼씨(三氏)를 검거한 후에 신간지회 사무실과 전긔(前記) 삼씨의 집을 수색한 후에 지난 십일 오후 대구로 압송하야 대구서(大邱署) 류치장에다가 류치한 후에 방금 극비밀리에서 엄중 취됴하는 중인 바"
3명이 검거된 사실을 기술한 다음에, 앞에 기록된 세 사람의 집과 신간회 사무실이 압수수색 당한 사실을 전했다. 경북 경찰이 박상희를 신간회 지부의 실질적 핵심 인물로 봤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다.
박상희는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족주의운동에 가속도를 붙여 나갔다. 위 사건으로 검거됐다가 풀려난 지 얼마 안 되는 12월 15일에는 선산군 청년동맹 창립준비위원회 현장에 등장했다. 그달 20일 자 <동아일보> 기사 '청년동맹 준비'는 선산군 청년들이 "통일적이며 목적의식적으로 전민족 정치투쟁"을 전개하고자 신간회 선산지회 회관에서 청년동맹 준비위원회 모임을 개최한 일을 전하면서 "박상희 군의 간략한 개회사"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박상희는 일제 경찰에 수시로 붙들렸다. 1928년 7월 28일 자 <동아일보>에도 그가 경북경찰부에 검거되고 그의 집이 압수수색 받은 일이 보도됐다. 이 기사는 그의 혐의점이 극비에 부쳐졌다고 덧붙였다. 그해 11월 11일 자 <조선일보>에도 선산경찰서에 검거된 사실이 실렸다. 1931년 4월 2일 자 <동아일보>에는 <우리의 전술>이란 팸플릿을 우편으로 받았다가 선산경찰서 구미주재소에 압수된 사실이 보도됐다.
20대 초반부터 집요한 감시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는 끝끝내 뜻을 이어갔다. 40세 때인 1945년 해방 직후에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구미지부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념이 변치 않고 유지됐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미군정에 맞서 일어섰다(대구 10월항쟁). 미군정이 친일청산을 훼방하며 친일파를 재기용하고, 부실한 경제정책으로 한국인들을 굶주리게 하고, 민족통합의 가능성을 점점 희박하게 만드는 데 대한 울분과 저항의 표시였다. 그에게 10월 항쟁은 독립투쟁의 연장이었다.
미군정에 대항했던 독립운동가, 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 1946년 10월 2일, 대구 태평로 삼국상회 부근에서 경찰이 진압을 벌이고 있고 왼쪽에는 시위 군중들이 경찰의 발포에 쫓기고 있으며 도로가에는 시민 여러 명이 쓰러진 모습. |
ⓒ 10월항쟁유족회 |
이 투쟁에서 그가 얼마나 열렬히 투쟁했는지는, 대구 항쟁을 '대구 폭동'으로 부르고 항쟁의 핵심 구호인 친일청산 요구를 빠트린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 같은 데서도 확인된다. 이 책은 "10월 1일 대구에서 좌익들이 '쌀 배급·일급제 반대·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동을 일으키고, 미군정에 의해 대구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폭동은 주변 농촌 지역으로 광역화됐다"고 한 뒤 이렇게 서술한다.
"이 과정에서 선산군 민전(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조직) 사무국장 겸 선산인민위원회 내무부장이던 박상희는 2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적기가를 부르면서 선산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박상희는 이 과정에서 인간적 포용력을 발휘하여 군중의 폭도화를 방지함으로써 우익 유지들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충청도에서 지원 나온 경찰 병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대구 10월항쟁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박정희의 형은 일제강점기 경력만으로도 대한민국 정부의 독립유공자로 대우 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박상희라는 이름은 독립유공자 1만 7848명 명단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좌파로 불린 진보진영의 일원이었고, 목숨을 걸고 미군정에 대항했다. 기득권층이 터부시할 만한 요인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명명백백한 독립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 않으면, 한국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서술될 수 없게 된다. 이런 인물을 독립운동가 외전(外傳)이 아닌 독립운동가 열전 혹은 본전(本傳)에 올려놓는 국민적 노력이 필요하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를 계기로 윤석열 정권은 국내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보다 대구·경북이라는 확실한 지역구를 둔 박정희에 좀더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차제에 윤석열 정권도 박정희뿐 아니라 그의 형 박상희에도 관심을 가져 박상희 서훈에 협력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