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출판사의 섹스로 가득한 소설…30년 외설-예술 논쟁의 결말은 [나쁜 책]

포르노 출판사의 섹스로 가득한 소설…30년 외설-예술 논쟁의 결말은 [나쁜 책]

[나쁜 책-22] 헨리 밀러 ‘북회귀선’


[금서기행, 나쁜 책]은 전 세계 현대의 금서를 여행합니다. 국가가 발행을 중단시킨 문학, 좌우 논쟁을 촉발한 논픽션, 외설의 누명을 쓴 예술, 동서고금의 필화 스캔들을 다룹니다.



1934년, 파리 한 출판사에서 책이 출간됐습니다. ‘포르노 전문 출판사’로 유명했던 오벨리스크 프레스(Obelisk Press)가 발간한 신작소설이었습니다.

‘음란물 출판사’로 유명했던 이 출판사가 낸 책은, 훗날 영국 가디언이 20세기 100대 소설로 선정할 만큼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헨리 밀러 ‘북회귀선’입니다.

‘솔직한 성행위’가 묘사된 이 책은 정식 수입도 전에 밀수판과 해적판이 유통됐습니다. 복제본을 유통한 사람은 저작권 소송 끝에 감옥까지 가도록 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1964년 미국 대법원이 30년 논쟁 끝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외설-예술 논쟁’을 촉발한 20세기 최고 문제작이지요.

오늘은 ‘나’ 자신이 타락했다고 느낄 때, 인생 항로가 한참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 펼쳐볼 만한 걸작 ‘북회귀선’을 여행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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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회귀선’을 쓴 미국 작가 헨리 밀러의 생전 모습. 이 소설은 그의 대표작이자 미국 문학사에서 ‘표현의 자유’의 분기점으로 기록되는 걸작입니다. 압도적인 성애 묘사 너머로 도도히 흐르는 철학적 사색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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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회귀선’의 영문판과 한국어판들. 이 소설은 여러 판본이 있습니다만, 이 기사는 1991년 판본인 가운데 문학세계사판을 저본 삼았습니다. 오랫동안 갖고 있던 책입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내 성기는 발기하였다”
책 ‘북회귀선’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작가와 동명인 밀러입니다.

그는 뉴욕 출신입니다. 그러나 2년 전부터 프랑스 파리에 거주 중입니다. 파리에서 밀러는 사실상 부랑자 신세입니다. 낯선 파리에서 친구들 집에 몸을 의탁할 만큼 가난했거든요. 새 세입자가 오면 방을 비워줘야 하는 빈털터리였습니다.

카페에 앉아 가끔 글은 쓰지만, 별다른 일감도 수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5프랑, 10프랑씩 빌려 쓰곤 했습니다. 밀러의 친구들은 그에게 굳이 돈을 받아낼 생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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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끔하게 차려 입었지만 주인공 밀러는 빈털터리입니다. 사진은 ‘북회귀선’을 원작 삼은 1970년 동명 영화 ‘북회귀선’ 한 장면. 뉴욕 출신인 밀러가 카페엣 파리의 친구들에게 5프랑을 빌리는 모습입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이방인으로서 비참한 생활, 그는 절망과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성편력이 심했습니다. 뉴욕에 사는 아내 모나와의 관계는 소원했고,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맡길까 고민합니다.

밀러는 파리 여성들과 숱한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친구 아내인 타니아와는 불륜 관계였고, 돈만 생기면 익명의 매춘부들과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작가 표현처럼 작품 속 밀러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루를 길거리에서 걸으면서도 발기하는” 삶이었습니다.

인생은 오래전 어긋나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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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부랑자 신세와 다름없는 소설 속 밀러는 파리의 ‘거리’를 자주 사유합니다. 거리는 밀러의 피난처입니다. 낯선 땅에서 지리멸렬한 삶을 이어가는 주인공 밀러는 자신의 신세를 지푸라기 따위로 비유합니다. [RymB]
푼돈에 스커트를 올리고 ‘그짓’ 중인 이방인들
어느 날, 세르즈란 친구가 밀러에게 두 일자리를 제안합니다. 하나는 극장 안으로 살균제 통을 굴려보내는 잡역부, 또 하나는 영어교습 교사였습니다.

첫날 복도바닥에서 잠을 자던 날, 살균제 냄새가 ‘온몸의 털구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고 그는 회고합니다. 교사 업무의 대가는 월급이 아니었습니다. ‘식사 제공’이었지요. 그래도 그건 자신이 선택한 삶이었기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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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북회귀선’ 장면들. 소설과 영화 속 주인공 밀러는 여성편력이 심했습니다. 친구의 아내와는 불륜관계였고 그가 만나선 안 되는 여성들까지 침대에서 함께 합니다. 타락과 번민, 그건 밀러의 두 가지 생활방식이었습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파리 거리엔 매춘부들이 많았습니다. 밀러는 푼돈만 생기면 기꺼이 매춘부에게 주고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거의 병적일 수준이었지요. 푼돈에 스커트를 올리는 여자들, 급기야 변소에서도 ‘그 짓’을 해주는 여자들까지, 파리는 열락과 들뜬 신열의 도시였습니다. 밀러는 성(性)에 탐닉합니다. 책 속 문장을 이곳에 옮겨적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300페이지가 넘는 책 한 권 전체가 외설로 가득합니다.

섹스와 실존, 그것도 아니면 죽음만이 가능할 것만 같은 날것 그대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밀러는 문득, 자신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무언가로부터 어긋났다고 느껴 버립니다. 호색한으로 전락한 파리의 이방인 밀러는 자신이 태어났던 도시 뉴욕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미국서 30년 걸린 ‘북회귀선’ 포르노 논쟁
파격적이고 적나라한 소설 ‘북회귀선’의 출간 이후, 이 책에 기술된 구체적인 성애 묘사는 출간 후 유럽과 미국에서 거센 ‘외설-예술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현재 2023년 기준으로도 성적 표현이 대담하다고 느껴질 정도인데, 엄숙했던 1930년대엔 더 큰 논란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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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의 영문 출판사 ‘오벨리스크 프레스’ 로고. 오벨리스크 프레스는 아방가르드한 문학과 포르노 사이의 문장을 엮은 작품을 주로 출간했다고 전해집니다. ‘프랑스에 출간한 영문 서적은 영국의 검열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교묘히 파고든 출판사였습니다. [Marc-AntoineV]1934년, ‘북회귀선’이 프랑스에서 영문판으로 출간되자 미국 정부는 책을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수입금지(禁輸) 조치를 내린 겁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책이 가진 악명과 기어이 기어이 읽으려는 독자의 수요는 비례합니다. 미국 한 출판인은 ‘북회귀선’을 팔았다가 소송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해적판까지 나돌았습니다. 책을 밀수입한 사람은 저작권 침해로 감옥에 갔습니다.

들불처럼 번지는 법정 다툼에도 불구하고 책 ‘북회귀선’의 생명력은 끈질겼습니다. 이 책을 읽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사이에서 벌어진 게임은 서두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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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 프레스가 출간한 헨리 밀러 ‘북회귀선’ 영문판. 책등 하단을 보시면 ‘오벨리스크 프레스’ 로고가 선명합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문제의 바로 그 책입니다. 갑각류 게가 한 여인을 집게로 잡고 있는 표지가 인상적입니다. 저 ‘게’에 대해선 아래 결말 부분에서 깊게 다루겠습니다. 책 아래에 ‘not to be imported into Britain or USA’란 문구가 보이네요. [헨리 밀러 도서관 홈페이지]‘북회귀선’은 1950년대에 미국 수입이 시도됐습니다. 미국 정부는 불허하고 책을 압류했습니다.

1960년대 들어서야 ‘북회귀선’은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출판되는데, 무려 21개주에서 이 책을 판매한 서점 60곳이 전부 ‘외설 출판물 판매 혐의’로 피소됩니다. 외신에 따르면 마이클 무스마노라는 판사는 이 책을 “오물 구덩이, 하수구, 부패의 구덩이, 타락한 잔해” 등으로 표현했다고 하네요.

그러나 1964년 미국 대법원 판결은 ‘북회귀선’을 둘러싼 외설성 비난을 단번에 역류시켰습니다. 대법원이 소설 ‘북회귀선’이 포르노라는 주(州)법원 판결을 기각하고, 책의 음란성을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책 ‘북회귀선’을 외설이 아닌 예술로 바라본 최초의 판결이었습니다.

그 사이, 영국·캐나다·핀란드에서 ‘북회귀선’이 압수되는 등 책은 수난과 고초를 겪던 중이었는데 미국 대법원 판결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책 출간 후 30년 만에 책을 둘러싼 ‘외설 논쟁’의 마침표가 찍혔습니다. 이후 헨리 밀러는 전 세계 가장 뜨거운 작가로 부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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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미국 대법원이 소설 ‘북회귀선’의 외설성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리면서 헨리 밀러는 예술성과 문학성을 인정 받았습니다. 1891년 태어난 그가 1980년 사망하기까지 최고의 논쟁작으로 기억될 판결이었지요. 사진은 1940년 헨리 밀러의 모습입니다. [미국의회도서관]
포르노와 예술의 줄타기, 역겹거나 추앙받거나
위에서 언급한 ‘북회귀선’ 줄거리로만 평가한다면, 이 책은 외설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돈 없고 희망 없는 뉴욕 출신 남성이 파리로 건너와 불륜녀와 매춘부를 탐하는 역겨운 내용의 연속이니까요.

막상 읽어보면,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역겨움보다는 ‘숭배이자 경이감’에 가까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세 부분만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문장은, 주인공 밀러가 자신의 파리 방랑을 실존적으로 인식하다 ‘자기혐오의 감정’을 분출하는 대목입니다.

① ‘거리에서, 나는 나 자신의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원래 먼지투성이인 길은 처음부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과거의 먼 시절부터 그 피로 더러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더럽고 작은 미이라처럼 이 세상에 내던져져 있다. 길은 피로 인해 축축하고 미끄럽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지상은 감미로운 것으로 썩어 있는데도, 과일을 딸 겨를이 없다.’ (198~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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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는 글쓰기를 이어갑니다. 그의 사색은 웬만한 철학자 이상의 수준입니다. 이 책이 자전소설이란 점으로 미루어볼 때 작가 헨리 밀러가 얼마나 치열한 생각을 갖고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영화 ‘북회귀선’ 한 장면. [파라마운트 픽처스]두 번째 문장은 밀러가 자신이 도저히 숨을 곳이 없는 생(生)임을 간파하고 시간에 관해 사유하는 문장입니다. 밀러는 죽음과 자살을 생각합니다. 무명 작가의 예술가다운 암중모색입니다.

② ‘시간의 암종(癌腫)이 우리를 파먹어 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살해 버렸거나, 지금 자살해 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은 ‘시간’이 아니라 바로 ‘무시간(無時間)’인 셈이다. 우리는 서로 밀치락거리며 죽음의 감옥을 향해 행진해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도피할 곳은 하나도 없다. 날씨가 바뀌지는 않으리라.’ (11쪽)

세 번째 문장은, 이 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110쪽 문장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왜 ‘북회귀선(北回歸線)’인지를 정확히 드러내는, 명문입니다.

③ ‘세계는 축(軸)이 없는 자오선을 따라, 일제히 그 드라마를 펼쳐나갔다. 잠깐 손을 대기만 해도 발사되는 이 촉발 방아쇠와 같은 영원 속에,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절대적 정당성이 주어지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는 시끄러운 비명 소리가 되어 내일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서 들끓고 있는 ‘죄악’을 느꼈다. 시간의 자오선 위에는, 부정(不正)이라곤 하나도 없다. 거기에는 진실과 드라마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운동의 시(詩)가 있을 뿐이다. 두려운 점은, 인간이 분뇨더미 속에서 장미를 창조하여온 일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장미를 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110쪽)

“잘못된 길의 종점에선,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멋진 문장임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저 ③의 문장, 참 어렵지요?

일단 저 문장의 진의를 이해하려면 ‘자오선’과 책의 제목 ‘북회귀선’의 정의부터 되짚어야 합니다.

자오선이란 관측자(인간)를 중심으로 북극 중앙과 남극 중앙을 잇는 반원형 호(弧)를 말합니다. 한 사람이 땅에 서 있을 때 그의 수직 하늘의 중앙을 가운데 두고 남극 중앙과 북극 중앙을 있는 반원을 뜻합니다. 지구엔 저 ‘관찰자’가 80억 명이기 때문에 저 선은 실재하는 선이 아닌, 상상의 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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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좌측 빨간 점이 북극의 중앙, 하단 우측 빨간 점이 남극의 중앙이라고 볼 때 관찰자(가운데 검은 모형)를 중심으로 반원의 호가 그어집니다. 이게 자오선(meridian)입니다. 관찰자가 볼 수 있는 땅의 끝은 지평선(horizon)이 됩니다. [Amitchell125]반면, 북회귀선이란 태양이 머리 위 천정을 90도 각도로 지나는 가장 북쪽 지점을 잇는 지구상의 선(線)을 말합니다. 북회귀선은 적도의 북쪽에서 태양이 90도로 지표면에 내리쬘 수 있는 최북단의 지점을 이은 선(태양방위각 직각 90도)입니다.

자오선이 관찰자가 위치하는 가상의 선인 반면,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은 실재하는 지점들을 연결한 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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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붉은 면적은 태양이 90도로 지표면에 내리쬘 수 있는 지구상의 지점을 뜻합니다. 저 면적의 최북단 지점을 이은 선이 북회귀선(Tropic of Cancer), 최남단 지점을 이은 선이 남회귀선(Tropic of Capricon)입니다. 태양을 도는 지구의 공전에 따라 지표면에 내리쬐는 태양빛은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를 반으로 가르면 북반구와 남반구의 가운데 선, 즉 적도가 됩니다. [KVDP]‘북회귀선’과 자오선이 의미하는 바는 간명합니다.

밀러는 자신의 삶을 자오선의 시간처럼 인식했습니다. 자오선은 관찰자가 어디에 서 있든 형성되기 때문에 모든 장소, 모든 위치, 모든 위도와 경도가 합당합니다(문장 ‘시간의 자오선 위에는 부정이라곤 하나도 없다’). 인간은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밀러는 파리에서의 타락한 생활을 통해 자신이 결국 ‘인생의 회귀선’에 도달했다고 느껴버립니다. 이국땅의 방랑자가 되어 자신의 삶의 중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섹스에 탐닉했으니까요.

밀러는 완벽하게 몰락해버린 자신의 삶에서, 태양이 90도로 내리쬐는 그곳에서, 발가벗겨진 한 개인이 됩니다(태양방위각 90도 아래에 선 밀러). 결국 파리는 밀러 자기 자신의 영혼의 본질을 인식하는 장소인 것이고, 타락의 끝에서 문득 ‘이.제.나.는.돌.아.가.야.한.다(나라는 본질로의 정신적인 회귀)’란 정신적인 귀소본능을 느껴버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책의 제목 ‘북회귀선(Tropic of Cancer)’의 의미인 것이지요.

잘못된 길의 종점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의미한다.” 작가 헨리 밀러는 소설의 제목이 ‘북회귀선’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만이 아는 삶의 중심으로 돌아가 ‘나’를 되찾아야 한다는 깨달음, 그것이 제목 ‘북회귀선’을 통해 상징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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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밀러 웹사이트. 그의 딸 발렌타인 밀러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입니다. 1980년 작고한 아버지 밀러의 25주기에 만들어진 일종의 추모 공간입니다. 발렌타인 밀러는 아버지 밀러를 두고 “진정으로 삶을 즐겼으며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을 포용함으로써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 인물”이라고 묘사합니다. [헨리 밀러 홈페이지]
생의 최후 순간, 사랑할 것인가 자살할 것인가
‘북회귀선’의 주인공 밀러의 작품을 단지 지독한 성애 묘사로만 가득한 포르노그라피로만 이해하기 곤란한 또 하나의 이유는, 주인공과 주변인물이 처한 세계사적 상황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집필된 시기는 1930년대 초반으로 1891년생 작가의 나이 40세 무렵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무려 ‘3000만명’이 죽거나 다친, 최악의 시대 바로 직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전운이 몰아쳤고, 수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 비극이 재개되지요.

파리에서 밀러가 만나는 인물 중 상당수는 유태인 혹은 반(半)유태인입니다. 그의 친구 보리스부터, 그의 불륜녀 타니아와 타니아의 남편 실베스터, 또 호색한 친구 반 놀든 모두가 유태인입니다. 저들은 죽음의 행렬 끝에 파리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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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밀러가 출간한 책들. 그는 철학자적인 시선으로 밀도 높은 사색의 문장을 남겼습니다. ‘남회귀선’, ‘사다리 아래에서의 미소’, ‘검은 봄’, ‘클리쉬의 고요한 나날’, ‘그리스 기행’, ‘넥서스’ 등이 한국에서도 출간됐으나 대부분 절판 상태입니다. [헨리 밀러 도서관 홈페이지]밀러는 그곳에서 유태인들을 관조하는 관찰자이기도 합니다. 지인들은 죽음에 근접한 삶을 살아가는, 그래서 성에 집착하면서 서로 뒤엉킨 성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애의 욕구를 에로스, 죽음의 욕구를 타나토스라 합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심리철학에서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인간에겐 자기 보존의 본능, 즉 삶의 충동(에로스)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 파괴의 본능, 즉 죽음의 충동(타나토스)가 공존합니다.

격렬한 불꽃처럼 성(性)을 분출하려는 섹스 욕구와 현실의 절망 속에서 자신을 훼손시키려는 자살 욕구는 인간의 본성인 것이지요. 이 소설에선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중심에 선 문제적 인물이 주인공 밀러입니다. 그런데도 소설 ‘북회귀선’을 한갓 음탕한 포르노로 격하시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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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밀러 도서관의 내부 전경. 미국 캘리포니아주 빅 서(Big Sur) 지역의 산에 위치한 숲속 도서관입니다. 이 지역은 헨리 밀러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에밀 화이트란 인물이 헨리 밀러를 위해 만든 도서관이라고 하네요. 밀러의 모든 책이 전시된 장소입니다. [헨리 밀러 도서관 홈페이지]
“시간의 암종이 우리를 파먹어 들어가고 있다“
1964년 미국 대법원이 ‘북회귀선’의 예술-외설 논란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이후, 작품은 영화로 제작됐습니다. 조셉 스트릭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 ‘북회귀선(Tropic of Cancer·1970)’입니다.

그런데 ‘북회귀선’ 영화를 검색하시면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Henry & June·1990)’이란 영화가 먼저 검색됩니다. 이 작품은 소설가 아나이스 닌이 쓴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1990년 작품인데, 밀러의 대표소설 ‘북회귀선’과 내용적으로 전혀 무관합니다.

헨리 밀러 ‘북회귀선’을 영화로 관람하시려면 개봉 연도(1970년도)를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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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1970년 개봉 영화 ‘북회귀선(Tropic of Cancer)’의 포스터. 가운데와 오른쪽 사진은 아나이스 닌의 소설 ‘헨리와 준(Henry & June)’을 원작 삼은 1990년 개봉 동명 영화 포스터. 영화 제목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뜬금없이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으로 명명됐습니다. 흥행을 위한 선택이었겠지요. 헨리 밀러 소설 ‘북회귀선’을 영화화한 작품은 왼쪽 1970년도 작품입니다.그런데 사실 또 따지고 보면, 두 영화가 완전히 무관하다고 보기도 어렵긴 합니다. 영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의 주요 인물 역시 헨리 밀러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자 아나이스 닌과 헨리 밀러는, 1930년대 바로 저 문제의 프랑스 파리에서 ‘불륜 관계’였습니다. 파리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이 각각의 소설을 집필한 겁니다. 어디까지가 실제 사실인지 모를 영화 속 내용도 충격적입니다. 어디까지가 실화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영화에선 닌이 밀러와 바람을 피웠는데 닌은 밀러의 부인 준(!)과도 동성애 관계를 형성합니다. (거참 복잡한 인간관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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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Henry & June’의 한 장면. 왼쪽부터 닌, 밀러, 준입니다. 세 사람의 삼각관계가 서사의 중심입니다. 닌은 밀러와 내연관계인데, 닌은 또 밀러의 아내 준과도 성적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도대체 1930년대 파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유니버셜 픽처스]이제 글을 마칠 시간입니다. 북회귀선은 영어로 ‘Tropic of Cancer’입니다. 여기서 단어 ‘cancer’는 우리가 아는 질병인 암(癌)을 뜻하지 않습니다. 별자리 중에 게자리를 뜻하는 라틴어 ‘캉케르’입니다. ‘tropic’은 회귀선을 뜻하는 그리스어 ‘tropikos’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북회귀선이 ‘게자리 회귀선(Tropic of Cancer)’으로 명명된 이유는, 태양이 북회귀선에 위치했을 때 별자리 중 게자리에 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회귀선 영문판 표지의 그림에 갑각류 ‘게’가 연인을 탐하고 있는 모습은 이 때문입니다.

탐욕스러운 게, 그게 바로 파리 시절의 밀러 자신이지요.

사실 암종양의 모양이 게 모양이어서 영단어도 ‘cancer’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작가 헨리 밀러는 이 책에서 중의적 단어인 ‘cancer’에 관한 사유를 이어갑니다. ②에서 소개한 문장, ‘시간의 암종(癌腫)이 우리를 파먹어 들어가고 있다’(11쪽)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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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를 그림으로 그린 그림. 북회귀선은 게자리(cancer)를 뜻하고 남회귀선은 염소자리(capricon)를 뜻합니다. [John Bevis]다음 문장 역시 암(cancer)에 대한 탁월한 비유입니다.

④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사방에 시간의 오점을 남기며 소멸해가고 있다. 세계는 스스로를 파먹어 들어가며 멸망시키는 암인 것이다. 시간의 자궁 속으로 모든 것들이 물러갈 때, 다시금 혼돈이 나타나리라. 혼돈이야말로, 그 위에 ‘진실’이 씌어질 악보다. 시간의 껍질을 벗기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죽어가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12쪽)

인간은 모두 길을 잃어버린, 시간의 고아(孤兒)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 시간이라는 암종 우리 자신을 파먹고 들어가고 있다고 작가 헨리 밀러는 쓰고 있습니다. 어디론가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 바로 ‘북회귀선’이 말하려 했던 영원한 인간의 주제일 겁니다. 우리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 바로 그런 마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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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촬영된 헨리 밀러의 모습. 그는 자오선, 북회귀선과 함께 암(癌)에 대한 사유를 이어갑니다. 소설 ‘북회귀선’은 약 90년이 지나도 영원히 그 문장의 빛의 퇴색되지 않은, 걸작 중의 걸작입니다. [Wim van Rossem]
이 기사는 다음 책과 논문, 외신기사를 참고했습니다.

◎ 헨리 밀러, 김진욱 옮김, 『북회귀선』, 문학세계사, 2015.

◎ 영국 출판편집자 로버트 맥크럼의 가디언 리뷰 ‘The 100 best novels: No 59: Tropic of Cancer by Henry Miller(1934)’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4/nov/03/100-best-novels-tropic-of-cancer-henry-miller)

◎ 헨리 밀러 도서관 홈페이지 (https://henrymiller.org/)

◎ 헨리 밀러의 딸 발렌타인 밀러가 운영 중인 추모 홈페이지 (https://www.henrymiller.info/)



※다음주에는 마광수 ‘운명’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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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Comments
자유인147 2023.12.10 18:15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유인289 2023.12.10 18:15  
김유태 기자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유인44 2023.12.10 18:15  
언어유희가 재밌다. 잡다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더 재밌게 볼수 있는거군요. 안 읽어봤는데 보고 싶게 만드는 기사네여
자유인4 2023.12.10 18:15  
철학과 과학적 통찰이 있는 수준 높은 작품이군요... 이 작품 이후 포르노 장면만 무작정 모방하면서  작품이라고 떠들어대는 부류가 한국에도 있는듯
자유인281 2023.12.10 18:15  
어릴때 친구네 집에서 보던 포르노와 중년이 되서 보는 포르노는  느낌이 달라 느낌이~ 야한 만화만 봐도 그래
자유인278 2023.12.10 18:15  
사실 성적 묘사 보다는 무능력한데 흔들리는 밀러가 묘사하는 파리 풍경이 더 마음에 안 와닿던 책입니다. 이 책으로 용감하게? 대학원 논문을 쓴 분도 주변에 계시긴 했죠. 예술가의 멋진 작품들을 좋아하지만 고뇌하고 방탕한 예술가들을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낍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도 어떤 기업 면접관이 봐도 신임을 느낄 것 같은 성실함과 치밀함을 갖춘 남성에만 매력을 느끼고요. 자기 연민에 빠져 약속이나 규율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겨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유인161 2023.12.10 18:15  
성애로 가득찬 온갖 금서조차도 지금 보면 평범하다. 타락이 범람하고 그 농도가 최고인 세상을 일상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지금은
자유인267 2023.12.10 18:15  
페미들은 예나 지금이나 문제. 2030여자들을 전부 잡아서 수장시켜야 한다
자유인103 2023.12.10 18:15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자유인154 2023.12.10 18:15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읽어봐야겠네요. 사실 제목만 보고 뭔가 해양관련한 주제가 아닐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군요..ㅎㅎ
자유인262 2023.12.10 18:15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잘 읽었어요.
자유인73 2023.12.10 18:15  
어릴때 제목만 알던 책인데 이런 내용이었구나..
자유인225 2023.12.10 18:15  
모든 좌익적 세계관을 기초로하는 서적은  독자의 좌경화를 위해 섹스를 입혀서 외설적으로 포장된다.
자유인20 2023.12.10 18:15  
일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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