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치료 중 살해... 이것이 집단학살 아니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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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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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14:21
[글로벌건강리포트] 보건의료 체계 붕괴 속에 전염병 창궐하는 가자지구
2024년 새해가 밝았지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은 벌써 석 달째 이어지고 있다. 작년 11월 24일 국제사회 압력에 떠밀려 시작한 '일시적 교전 중단'은 불과 7일 만에 깨졌다. 1월 4일 현재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2만 2천 명을 넘어섰고, 이 중 70%가 어린이와 여성이다. 7천 명 이상이 실종됐고(잔해에 깔려 사망 추정), 부상자는 5만 7천 명 이상이다.
보건의료 체계 붕괴, 전염병 창궐하는 가자지구
가자지구는 전기·상하수도 중단으로 최소한의 위생조차 불가능하고, 병원을 표적 삼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보건의료 체계 역시 무너졌다. 팔레스타인 인구 85%인 190만 명 이상이 폭격을 피해 피난 중으로, 대부분 가자지구 남부에서 과밀한 대피시설에 머물고 있다. 사실상 전염병이 창궐할 모든 조건이 갖춰진 셈으로, 세계보건기구(WHO)는 일찍부터 "폭격으로 인한 사망보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더 많아질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자지구에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작년 말 기준, 18만 명의 상기도 감염, 13만 6천 명의 설사병(절반이 5세 미만 아동), 5천 명의 수두 사례가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가자지구 보건의료 체계가 붕괴해 정확한 검사와 진단은 불가능한 상황으로, 수십만 설사병 사례의 원인도 확인할 수 없다. 진단이 있다고 해도 치료를 위한 의약품조차 구하기 어렵다.
어린이들의 기본 예방접종이 중단된 상황에서 전염병 확산은 심각한 문제다. 소아마비, 홍역, 풍진, 뇌수막염, 간염 등은 어린이에게 특히 치명적일 수 있다. 극도의 굶주림과 스트레스 속에 있는 연약한 신체는 질병에 더더욱 취약하다. 제대로 작동하는 보건의료 체계만 있다면 쉽게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아이들이 죽거나 손상을 입는 상황은 차마 이보다 더 비극일 수 없다.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통제하는 이스라엘은 자국 군인에게 전염될 것을 염려해 백신 반입을 예외적으로 허용했다. 하지만 예방접종에는 백신뿐 아니라 각종 인프라와 의료 물품, 인력이 필요하고, 가자지구에는 이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의 증거
작년 12월 29일, 새해를 앞둔 마지막 평일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이스라엘을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 유엔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른 의무를 위반한 혐의다. 협약에 따르면,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이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행하여진 행위"를 말한다.
남아공 정부가 소장에 적시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집단학살 혐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요약하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파괴적 생활 조건으로는 구체적으로,
이러한 행위는 '제노사이드 협약' 제2조에 따른 집단학살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 무엇보다 가자지구 보건의료 체계는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군사점령과 봉쇄에 더해 이번 이스라엘의 병원 표적 공격으로 완전히 붕괴했다. 대부분 병원과 구급차가 파괴되었고, 의료진 역시 병원과 집에서 동료, 가족과 함께 폭격에 사망했다.
치료 중이던 환자, 신생아와 어린이, 임산부, 노인과 장애인은 대피하지 못한 채 살해당했다. 의료 물자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부상자들은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거나, 소독 부족으로 괴사한 사지를 마취 없이 절단하고 있다. 만성질환자 치료는 감히 상상조차 어렵다. 보건의료 체계의 처참한 파괴는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자지구의 회복과 재기를 어렵게 할 것이다. 이것이 집단학살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남아공이 이스라엘 제소한 이유
팔레스타인도 아닌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제소한 이유가 뭘까. 남아공 정부는 소장에서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 협약 위반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는 데 있어 책임의 무게가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라면서도, "제노사이드 협약 당사국으로서 제노사이드를 방지해야 할 의무 또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또한 "남아공의 고통스러운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경험이, 국제법에 따라 회원국으로서 조치를 취하게 한다"라고 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사람을 인종에 따라 분류하여 인종 간 혼인을 금지하고 거주지와 출입 구역을 분리하는 등 극단적으로 비 백인을 분리·차별한 정책이다. 1948년 백인 정권에 의해 법률로 공식화된 후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 당선으로 완전 폐지되기까지 약 40여 년 동안 제도적으로 시행됐다. 남아공 공용어 중 하나인 아프리칸스어로 아파르트헤이트는 '분리'를 의미한다.
1973년 유엔총회는 '아파르트헤이트 범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아파르트헤이트 협약)'을 채택하고 1974년에는 남아공의 유엔총회 의결권을 박탈하는 등 남아공에 제재를 가했다. 이후 이 용어는 남아공 사례를 넘어 사용된다. 협약에 따르면, 아파르트헤이트란 "(남아공에서 수행된 것과 유사한 인종 분리·차별 정책과 관행을 포함하여) 한 인종집단이 다른 인종집단에 대한 지배를 확립, 유지하고 체계적으로 억압할 목적으로 행하는 비인간적 행위"를 말한다.
아파르트헤이트와 집단학살 모두 한 인종집단이 다른 인종집단을 대상으로 벌이는 비인도적, 비인간적 범죄라는 점은 동일하다. 다만 집단살해나 파괴적 생활조건의 부과 등 유사한 행위라고 해도, 집단학살로 인정되려면 해당 인종집단을 파괴할 의도로 행해졌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남아공 정부는 현재 이스라엘의 행위가 팔레스타인 국가와 그 일부로서 가자지구 주민을 파괴한다는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저지르는 집단학살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75년 간 지속된 아파르트헤이트, (1967년 이후) 56년 간 지속된 팔레스타인 영토 군사점령, (2007년 이후) 16년 간 지속된 가자지구 봉쇄"라는 유구한 지배와 억압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행해온 차별적 정책과 관행은 남아공 이후 대표적 아파르트헤이트 사례로 꼽힌다. 팔레스타인 점령지 인권상황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은 2007년과 2022년 발간한 '1967년 이후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인권 상황' 보고서를 통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군사점령한 후 시행해 온 정책과 관행이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에 해당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휴먼라이츠워치와 국제앰네스티 같은 주요 국제 인권단체도 각각 2021년과 2022년 마찬가지 내용을 담아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냈다.
이스라엘 집단학살의 역사적 맥락, '의료 아파르트헤이트'
병원을 표적으로 한 이스라엘의 이번 공격에 많은 이들이 경악하지만, 이스라엘의 이러한 집단학살 행위에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뿌리가 있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다.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의 국제법상 공식 정의는 없다. 흔히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의료 서비스가 만연하게 분리되는 상황이나 의료 환경에서의 차별적·착취적·학대적 대우를 가리킨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중·저소득 국가가 백신을 구할 수 없었던 불평등한 상황을 가리켜, 초국적 제약사와 고소득 국가에 의한 인위적 차별행위가 원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백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미국 드렉셀대 연구팀이 <Global Public Health (국제공중보건)>지에 2023년 4월 발표한 '팔레스타인에서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제목의 논문은 이스라엘의 차별적 의료 정책과 관행이 팔레스타인인의 건강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보건의료 재원조달, 보건의료시설·노동자·교통수단에 대한 공격, 전문 의료 서비스 의뢰에 관한 자료를 종합하여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첫째,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보건의료 체계 발전을 위한 자금을 체계적으로 박탈했다. 1994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합의한 '파리 의정서(1995년 2차 오슬로 협정에 통합)'는 중요한 정치적 맥락이다. 이 의정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모든 국경과 관세를 통제하도록 함으로써 팔레스타인 경제를 이스라엘에 종속시켰다.
이스라엘은 관세를 대리 징수하여 매월 자치정부에 이전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를 남용하여 징수한 세금의 25%를 원천징수한 후 75%만 이전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제기구나 공여국의 원조 등 국제사회 지원을 받아 부족한 정부 재정을 조달해 왔지만, 최근 수년간 원조액 감소와 공여국의 이행 저조로 극심한 재정난에 처해 있다.
둘째, 의료 인프라가 빈번하게 공격받았다. 비단 이번 '전쟁' 만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의료 시설과 인력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일례로 2020년에는 서안지구에서 일어난 시위기간 이스라엘군이 의료 시설과 구급차를 공격했는데, 부상당한 시위대를 응급 처치하던 구급차에 수류탄을 던지는 식이었다. 매년 발생하는 수백 건 공격에서 수십 수백 명 의료진이 부상을 입고 일부는 사망했다.
셋째, 낙후된 의료 서비스로 인해 팔레스타인 주민은 많은 경우 거주지를 벗어나 전문 의료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당국은 이를 위해 허가 신청을 요구하면서도 승인을 거부하거나 지연시켰다. 이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 있다.
코로나19 백신 사례는 더욱 노골적이고 체계적인 분리·차별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거주하는 약 500만 명 팔레스타인인은 코로나19 백신 접종 프로그램에서 제외하면서,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66만 6천 명 이스라엘 정착민은 포함시켰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막으려는 시도를 계속하면서도,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논의할 때만큼은 전략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자치국가로 간주했다.
이러한 의료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영향은 팔레스타인인에서 이스라엘인보다 9년 짧은 기대수명, 6배 높은 영아사망률이라는 극심한 건강 불평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불평등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의도적 정책의 예측 가능한 효과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 건강 불평등은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를 통한 의료 접근권 박탈뿐 아니라, 일할 권리, 주거권, 재산 소유 및 향유권 등 다른 여러 권리를 침해하는 총체적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통해 작동한다. 그럼에도 의료 아파르트헤이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보다 넓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결과라는 점,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인의 건강과 복지를 박탈하여 정복하려는 의도적 도구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배 겪은 한국의 책임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매달 한 번씩은 해외 방문에 나설 정도로 외교에 진심이다. 틈만 나면 '자유'와 '반공'을 부르짖으며 안보 걱정도 누구 못지않다. 하지만 지난 세 달 동안 이 중대한 국제안보 문제에 대해 윤 대통령은 "무장단체 하마스 규탄" 외 책임 있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정부는 유엔총회의 '휴전 촉구 결의안'에 기권을 하고, 심지어 한국 청해부대의 홍해 파병을 고려하는 중이다. 홍해를 봉쇄한 예멘 후티 반군의 요구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중단과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파병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에 기여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한국은 군사거래 뿐 아니라 여타 물품의 수출입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배와 아파르트헤이트에 기여해 왔다. 2009년 이명박 정부가 검토를 시작한 한-이스라엘 FTA는 2016년 박근혜 정부가 협상을 개시하고 2021년 문재인 정부가 타결, 서명한 후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 발효됐다. 한-이스라엘 FTA는 한국이 중동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FTA이자, 이스라엘로서도 아시아와 맺은 최초의 FTA다.
한국은 올해와 내년 2년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한다. 외교부는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수임을 통해 글로벌 중추국가 비전을 적극 실현해 나갈 예정"이라며, "북한 문제는 물론, 우크라이나 사태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등 국제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사안에 대해 안보리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책임 있는 역할을 해 나가기로 했다"는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정부의 그간 태도로 비추어 볼 때 평화 논의에 어깃장이나 놓지 않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유엔 안보리 논의 참여는 물론 한국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겪은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집단학살 혐의로 제소했다면,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 역시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데 목소리를 내야 한다.
▲ 지난해 12월 29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중부 데이브 알발라의 알아크사 병원에서 한 여성이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8살 쌍둥이 아이의 손에 입을 맞추며 애도하고 있다. |
ⓒ AFP/연합뉴스 |
2024년 새해가 밝았지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은 벌써 석 달째 이어지고 있다. 작년 11월 24일 국제사회 압력에 떠밀려 시작한 '일시적 교전 중단'은 불과 7일 만에 깨졌다. 1월 4일 현재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2만 2천 명을 넘어섰고, 이 중 70%가 어린이와 여성이다. 7천 명 이상이 실종됐고(잔해에 깔려 사망 추정), 부상자는 5만 7천 명 이상이다.
보건의료 체계 붕괴, 전염병 창궐하는 가자지구
가자지구는 전기·상하수도 중단으로 최소한의 위생조차 불가능하고, 병원을 표적 삼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보건의료 체계 역시 무너졌다. 팔레스타인 인구 85%인 190만 명 이상이 폭격을 피해 피난 중으로, 대부분 가자지구 남부에서 과밀한 대피시설에 머물고 있다. 사실상 전염병이 창궐할 모든 조건이 갖춰진 셈으로, 세계보건기구(WHO)는 일찍부터 "폭격으로 인한 사망보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더 많아질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자지구에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작년 말 기준, 18만 명의 상기도 감염, 13만 6천 명의 설사병(절반이 5세 미만 아동), 5천 명의 수두 사례가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가자지구 보건의료 체계가 붕괴해 정확한 검사와 진단은 불가능한 상황으로, 수십만 설사병 사례의 원인도 확인할 수 없다. 진단이 있다고 해도 치료를 위한 의약품조차 구하기 어렵다.
어린이들의 기본 예방접종이 중단된 상황에서 전염병 확산은 심각한 문제다. 소아마비, 홍역, 풍진, 뇌수막염, 간염 등은 어린이에게 특히 치명적일 수 있다. 극도의 굶주림과 스트레스 속에 있는 연약한 신체는 질병에 더더욱 취약하다. 제대로 작동하는 보건의료 체계만 있다면 쉽게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아이들이 죽거나 손상을 입는 상황은 차마 이보다 더 비극일 수 없다.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통제하는 이스라엘은 자국 군인에게 전염될 것을 염려해 백신 반입을 예외적으로 허용했다. 하지만 예방접종에는 백신뿐 아니라 각종 인프라와 의료 물품, 인력이 필요하고, 가자지구에는 이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의 증거
▲ 지난해 12월 13일, 피란민 대부분이 모여 있는 가자지구 남부 라파의 실향민 캠프에서 어린이들이 이불과 비닐을 덮고 야외에 앉아 있다. |
ⓒ AFP/연합뉴스 |
작년 12월 29일, 새해를 앞둔 마지막 평일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이스라엘을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 유엔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른 의무를 위반한 혐의다. 협약에 따르면,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이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행하여진 행위"를 말한다.
남아공 정부가 소장에 적시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집단학살 혐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요약하면 이스라엘은,
(1)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대규모로 살해하고 있으며,라는 것이다.
(2)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위해를 가하고 있으며, 집단으로서 그들의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 조건을 부과하고 있다.
이러한 파괴적 생활 조건으로는 구체적으로,
(3) 집과 주거지의 대규모 파괴와 함께 집에서 쫓겨나고 대량으로 이주하는 것,를 예로 들었다.
(4) 적절한 식량과 물에 대한 접근권 박탈,
(4) 적절한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 박탈,
(5) 적절한 쉼터, 의복, 위생에 대한 접근권 박탈,
(6)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의 파괴,
(7) 팔레스타인인 출산을 막을 목적으로 의도된 조치의 부과
이러한 행위는 '제노사이드 협약' 제2조에 따른 집단학살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 무엇보다 가자지구 보건의료 체계는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군사점령과 봉쇄에 더해 이번 이스라엘의 병원 표적 공격으로 완전히 붕괴했다. 대부분 병원과 구급차가 파괴되었고, 의료진 역시 병원과 집에서 동료, 가족과 함께 폭격에 사망했다.
치료 중이던 환자, 신생아와 어린이, 임산부, 노인과 장애인은 대피하지 못한 채 살해당했다. 의료 물자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부상자들은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거나, 소독 부족으로 괴사한 사지를 마취 없이 절단하고 있다. 만성질환자 치료는 감히 상상조차 어렵다. 보건의료 체계의 처참한 파괴는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자지구의 회복과 재기를 어렵게 할 것이다. 이것이 집단학살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남아공이 이스라엘 제소한 이유
▲ 지난해 12월 14일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화염이 치솟고 있다. 이스라엘은 미국 등 국제사회의 휴전 압박에도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제거를 목표로 지상전을 이어가고 있다. |
ⓒ 연합뉴스 |
팔레스타인도 아닌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제소한 이유가 뭘까. 남아공 정부는 소장에서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 협약 위반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는 데 있어 책임의 무게가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라면서도, "제노사이드 협약 당사국으로서 제노사이드를 방지해야 할 의무 또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또한 "남아공의 고통스러운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경험이, 국제법에 따라 회원국으로서 조치를 취하게 한다"라고 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사람을 인종에 따라 분류하여 인종 간 혼인을 금지하고 거주지와 출입 구역을 분리하는 등 극단적으로 비 백인을 분리·차별한 정책이다. 1948년 백인 정권에 의해 법률로 공식화된 후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 당선으로 완전 폐지되기까지 약 40여 년 동안 제도적으로 시행됐다. 남아공 공용어 중 하나인 아프리칸스어로 아파르트헤이트는 '분리'를 의미한다.
1973년 유엔총회는 '아파르트헤이트 범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아파르트헤이트 협약)'을 채택하고 1974년에는 남아공의 유엔총회 의결권을 박탈하는 등 남아공에 제재를 가했다. 이후 이 용어는 남아공 사례를 넘어 사용된다. 협약에 따르면, 아파르트헤이트란 "(남아공에서 수행된 것과 유사한 인종 분리·차별 정책과 관행을 포함하여) 한 인종집단이 다른 인종집단에 대한 지배를 확립, 유지하고 체계적으로 억압할 목적으로 행하는 비인간적 행위"를 말한다.
아파르트헤이트와 집단학살 모두 한 인종집단이 다른 인종집단을 대상으로 벌이는 비인도적, 비인간적 범죄라는 점은 동일하다. 다만 집단살해나 파괴적 생활조건의 부과 등 유사한 행위라고 해도, 집단학살로 인정되려면 해당 인종집단을 파괴할 의도로 행해졌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남아공 정부는 현재 이스라엘의 행위가 팔레스타인 국가와 그 일부로서 가자지구 주민을 파괴한다는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저지르는 집단학살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75년 간 지속된 아파르트헤이트, (1967년 이후) 56년 간 지속된 팔레스타인 영토 군사점령, (2007년 이후) 16년 간 지속된 가자지구 봉쇄"라는 유구한 지배와 억압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행해온 차별적 정책과 관행은 남아공 이후 대표적 아파르트헤이트 사례로 꼽힌다. 팔레스타인 점령지 인권상황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은 2007년과 2022년 발간한 '1967년 이후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인권 상황' 보고서를 통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군사점령한 후 시행해 온 정책과 관행이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에 해당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휴먼라이츠워치와 국제앰네스티 같은 주요 국제 인권단체도 각각 2021년과 2022년 마찬가지 내용을 담아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냈다.
이스라엘 집단학살의 역사적 맥락, '의료 아파르트헤이트'
▲ 지난해 11월 10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알시파 병원에 환자들이 누워있는 모습. |
ⓒ AFP/연합뉴스 |
병원을 표적으로 한 이스라엘의 이번 공격에 많은 이들이 경악하지만, 이스라엘의 이러한 집단학살 행위에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뿌리가 있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다.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의 국제법상 공식 정의는 없다. 흔히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의료 서비스가 만연하게 분리되는 상황이나 의료 환경에서의 차별적·착취적·학대적 대우를 가리킨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중·저소득 국가가 백신을 구할 수 없었던 불평등한 상황을 가리켜, 초국적 제약사와 고소득 국가에 의한 인위적 차별행위가 원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백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미국 드렉셀대 연구팀이 <Global Public Health (국제공중보건)>지에 2023년 4월 발표한 '팔레스타인에서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제목의 논문은 이스라엘의 차별적 의료 정책과 관행이 팔레스타인인의 건강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보건의료 재원조달, 보건의료시설·노동자·교통수단에 대한 공격, 전문 의료 서비스 의뢰에 관한 자료를 종합하여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첫째,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보건의료 체계 발전을 위한 자금을 체계적으로 박탈했다. 1994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합의한 '파리 의정서(1995년 2차 오슬로 협정에 통합)'는 중요한 정치적 맥락이다. 이 의정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모든 국경과 관세를 통제하도록 함으로써 팔레스타인 경제를 이스라엘에 종속시켰다.
이스라엘은 관세를 대리 징수하여 매월 자치정부에 이전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를 남용하여 징수한 세금의 25%를 원천징수한 후 75%만 이전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제기구나 공여국의 원조 등 국제사회 지원을 받아 부족한 정부 재정을 조달해 왔지만, 최근 수년간 원조액 감소와 공여국의 이행 저조로 극심한 재정난에 처해 있다.
둘째, 의료 인프라가 빈번하게 공격받았다. 비단 이번 '전쟁' 만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의료 시설과 인력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일례로 2020년에는 서안지구에서 일어난 시위기간 이스라엘군이 의료 시설과 구급차를 공격했는데, 부상당한 시위대를 응급 처치하던 구급차에 수류탄을 던지는 식이었다. 매년 발생하는 수백 건 공격에서 수십 수백 명 의료진이 부상을 입고 일부는 사망했다.
셋째, 낙후된 의료 서비스로 인해 팔레스타인 주민은 많은 경우 거주지를 벗어나 전문 의료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당국은 이를 위해 허가 신청을 요구하면서도 승인을 거부하거나 지연시켰다. 이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 있다.
코로나19 백신 사례는 더욱 노골적이고 체계적인 분리·차별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거주하는 약 500만 명 팔레스타인인은 코로나19 백신 접종 프로그램에서 제외하면서,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66만 6천 명 이스라엘 정착민은 포함시켰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막으려는 시도를 계속하면서도,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논의할 때만큼은 전략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자치국가로 간주했다.
이러한 의료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영향은 팔레스타인인에서 이스라엘인보다 9년 짧은 기대수명, 6배 높은 영아사망률이라는 극심한 건강 불평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불평등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의도적 정책의 예측 가능한 효과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 건강 불평등은 의료 아파르트헤이트를 통한 의료 접근권 박탈뿐 아니라, 일할 권리, 주거권, 재산 소유 및 향유권 등 다른 여러 권리를 침해하는 총체적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통해 작동한다. 그럼에도 의료 아파르트헤이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보다 넓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결과라는 점,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인의 건강과 복지를 박탈하여 정복하려는 의도적 도구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배 겪은 한국의 책임
▲ 지난해 4월 27일 미국을 국빈 방문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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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매달 한 번씩은 해외 방문에 나설 정도로 외교에 진심이다. 틈만 나면 '자유'와 '반공'을 부르짖으며 안보 걱정도 누구 못지않다. 하지만 지난 세 달 동안 이 중대한 국제안보 문제에 대해 윤 대통령은 "무장단체 하마스 규탄" 외 책임 있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정부는 유엔총회의 '휴전 촉구 결의안'에 기권을 하고, 심지어 한국 청해부대의 홍해 파병을 고려하는 중이다. 홍해를 봉쇄한 예멘 후티 반군의 요구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중단과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파병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에 기여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한국은 군사거래 뿐 아니라 여타 물품의 수출입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배와 아파르트헤이트에 기여해 왔다. 2009년 이명박 정부가 검토를 시작한 한-이스라엘 FTA는 2016년 박근혜 정부가 협상을 개시하고 2021년 문재인 정부가 타결, 서명한 후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 발효됐다. 한-이스라엘 FTA는 한국이 중동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FTA이자, 이스라엘로서도 아시아와 맺은 최초의 FTA다.
한국은 올해와 내년 2년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한다. 외교부는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수임을 통해 글로벌 중추국가 비전을 적극 실현해 나갈 예정"이라며, "북한 문제는 물론, 우크라이나 사태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등 국제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사안에 대해 안보리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책임 있는 역할을 해 나가기로 했다"는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정부의 그간 태도로 비추어 볼 때 평화 논의에 어깃장이나 놓지 않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유엔 안보리 논의 참여는 물론 한국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겪은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집단학살 혐의로 제소했다면,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 역시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병원 폭격으로 사망한 Mahmoud Abu Nujaila 박사가 수술 계획을 적는데 사용되는 병원 화이트보드에 남긴 글귀입니다. 총소리가 잦아들고 참혹한 규모가 드러나면, 위원회와 위원들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요?
(2023년 12월 4일 유엔 안보리에 보낸 국경없는의사회의 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