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엄마, 나는 발가락이 손에 달렸어
자유인295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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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 17:04
엄마가 말한 재주 많은 손... 사소한 칭찬 한 마디가 가져온 커다란 변화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편집자말>
여기 시시한 대화가 있다. 우리는 하루에 수 천 마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만, 그 중 어떤 사소한 문장들은 작은 씨처럼 던져져 상대의 마음 구석에 깊이 박힐 때가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콕 박힌 씨앗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엄마, 나 발가락이 여기에 있어!"
다급한 목소리였는지, 웃음을 터뜨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바닥에 앉아 둥글게 허리를 굽혀 발가락 위에 엄지 손가락을 얹은 채 엄마를 호출했다. 왠지 양 손가락이 서로 짝짝이 같다는 의심이 들었는데, 정말로 엄지가 있을 자리에 발가락이 올라왔을 줄이야. 아니면 손가락이 발가락으로 변해버린 걸까.
손재주 많은 손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 달려온 엄마는 내 손을 요리조리 반죽하며 살피더니, 고양이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펴듯 손을 나란히 펼쳐 열 개의 방향으로 뻗어나간 가닥들의 키를 재 보았다.
나의 외침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오른쪽 엄지가 정확히 한 마디 정도 짧아 발가락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 형태.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무언가 조금 어긋난듯한 내 손발을 위아래로 들여다보는 엄마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오, 이거 재주 많은 손이네?"
의외의 판결이 내려졌다. 손가락 길이와 나의 잠재력이 무슨 상관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어리둥절한 어린이였다가, 앞으로 나는 재주가 많을 것이라며 활짝 웃는 엄마를 보니 금세 꽤 멋진 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재주꾼의 특별한 손이란 말이지. 수시로 손을 바라보며 두 개의 엄지를 맞추는 일은 흥미진진한 놀이가 되었다.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 듯 양 손 똑같은 모양이면 하품 나오게 지루했을 것이다.
더욱이 내 비범한 손가락을 본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고, 손재주가 많겠어?'라며 두텁게 덕담을 쌓아갔다. 마치 햇볕이 따사로운 아침에 '오늘 날씨가 좋네?'라며 그저 당연한 사실을 건네는 가뿐한 느낌으로. 덕분에 내 손에는 아무런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았고.
매년 3월의 새학기, 엄지손가락은 내 비장의 무기. 아무리 차갑고 낯선 교실에 앉아 있더라도, 슬쩍 몸을 돌려 뒤에 앉은 친구에게 수줍게 손을 내미는 순간은 짜릿했다. 3초를 조용히 세고 있으면 동그래진 눈과 함께 '우와! 완전 신기해!'라는 반응이 늘 터져나왔다. 그럼 주변에서 웅성웅성 아이들이 몰려와 내 오른쪽 엄지를 구경하곤 했다. 재주 많은 손이라더니, 친구를 사귀는 재주도 포함됐을까.
물론 긴 손가락에 반짝 빛나는 손톱을 보면 살짝 부럽긴 했다. 아무리 특별한 손이어도 발가락처럼 옆으로 길쭉하고 납작한 탓에 어떤 매니큐어를 발라도 뭉툭한 존재감을 뽐냈기 때문. 그래도 그 뿐이었다. 한참 어른이 되고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재주 많은 손가락을 자랑하며 당당함을 이어갔다.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리
정말 최근에서야 알았다. 이런 손가락이 '단지증'이라고 불리는 것을. 발가락이나 손가락 뼈는 존재하지만 그 중 일부가 비교적 덜 성장한 '질환'이라며 정의된 단어가 으스스했다.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 뼈를 늘리는 수술까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에 가득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세계를 목격한 나. 그저 개성으로만 여겼던 엄지가 누군가에겐 어둠이라는 사실이 기묘했다. 나의 밝은 날들은 당연하지 않았다.
다시 최초의 따뜻한 발견을 떠올려본다. 순간 마음 속으로 날아온 말 덕분에 푸르른 들판이 되어 지금까지 내 손은 구석으로 숨은 적이 없었다. 누군가 어린 내 손가락을 보고 '어머 왜 이렇게 됐어?'라는 한 마디로 뾰족하게 찔렀더라면, 나 또한 땅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고 구름이 발 밑으로 깔린 세상에서 잔뜩 쪼그라들었을 텐데.
새하얀 소라 껍데기를 귀에 가져다 대고 집채 만한 파도 소리를 상상하듯, 내 짧은 손가락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무채색으로 위축된 마음을 아주 약간,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이들은 너무나 많아서 어떤 시선에서든 닿을 수 있지만 번번히 놓칠 때가 더 많다. 그에게 파릇파릇한 씨앗을 불어 넣으려 주머니 가득 담아 기회를 엿보다, 기다렸다는 듯 잔뜩 전해줘야지.
'발가락이 손에 달렸다'는 어릴 적 내 말이 아직도 또렷하다며 엄마는 웃었다. 때마침 엄마 친구의 엄지도 나처럼 짧았는데, 정말 재주가 많았던 게 떠올랐다고. 바람에 기다랗게 커튼이 날리는 교실 안, 재주꾼 친구의 손가락을 관찰하는 교복 입은 엄마를 상상하며 내가 가진 능력은 얼마나 되는지 세어본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손 덕분이니까. 내 엄지 손가락은 아주 귀엽고 멋지다.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편집자말>
여기 시시한 대화가 있다. 우리는 하루에 수 천 마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만, 그 중 어떤 사소한 문장들은 작은 씨처럼 던져져 상대의 마음 구석에 깊이 박힐 때가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콕 박힌 씨앗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엄마, 나 발가락이 여기에 있어!"
다급한 목소리였는지, 웃음을 터뜨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바닥에 앉아 둥글게 허리를 굽혀 발가락 위에 엄지 손가락을 얹은 채 엄마를 호출했다. 왠지 양 손가락이 서로 짝짝이 같다는 의심이 들었는데, 정말로 엄지가 있을 자리에 발가락이 올라왔을 줄이야. 아니면 손가락이 발가락으로 변해버린 걸까.
손재주 많은 손
▲ 여섯 개의 발가락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엄지손가락 |
ⓒ 조성하 |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 달려온 엄마는 내 손을 요리조리 반죽하며 살피더니, 고양이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펴듯 손을 나란히 펼쳐 열 개의 방향으로 뻗어나간 가닥들의 키를 재 보았다.
나의 외침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오른쪽 엄지가 정확히 한 마디 정도 짧아 발가락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 형태.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무언가 조금 어긋난듯한 내 손발을 위아래로 들여다보는 엄마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오, 이거 재주 많은 손이네?"
의외의 판결이 내려졌다. 손가락 길이와 나의 잠재력이 무슨 상관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어리둥절한 어린이였다가, 앞으로 나는 재주가 많을 것이라며 활짝 웃는 엄마를 보니 금세 꽤 멋진 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재주꾼의 특별한 손이란 말이지. 수시로 손을 바라보며 두 개의 엄지를 맞추는 일은 흥미진진한 놀이가 되었다.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 듯 양 손 똑같은 모양이면 하품 나오게 지루했을 것이다.
더욱이 내 비범한 손가락을 본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고, 손재주가 많겠어?'라며 두텁게 덕담을 쌓아갔다. 마치 햇볕이 따사로운 아침에 '오늘 날씨가 좋네?'라며 그저 당연한 사실을 건네는 가뿐한 느낌으로. 덕분에 내 손에는 아무런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았고.
매년 3월의 새학기, 엄지손가락은 내 비장의 무기. 아무리 차갑고 낯선 교실에 앉아 있더라도, 슬쩍 몸을 돌려 뒤에 앉은 친구에게 수줍게 손을 내미는 순간은 짜릿했다. 3초를 조용히 세고 있으면 동그래진 눈과 함께 '우와! 완전 신기해!'라는 반응이 늘 터져나왔다. 그럼 주변에서 웅성웅성 아이들이 몰려와 내 오른쪽 엄지를 구경하곤 했다. 재주 많은 손이라더니, 친구를 사귀는 재주도 포함됐을까.
물론 긴 손가락에 반짝 빛나는 손톱을 보면 살짝 부럽긴 했다. 아무리 특별한 손이어도 발가락처럼 옆으로 길쭉하고 납작한 탓에 어떤 매니큐어를 발라도 뭉툭한 존재감을 뽐냈기 때문. 그래도 그 뿐이었다. 한참 어른이 되고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재주 많은 손가락을 자랑하며 당당함을 이어갔다.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리
▲ 단지증으로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 |
ⓒ 네이버 지식in |
정말 최근에서야 알았다. 이런 손가락이 '단지증'이라고 불리는 것을. 발가락이나 손가락 뼈는 존재하지만 그 중 일부가 비교적 덜 성장한 '질환'이라며 정의된 단어가 으스스했다.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 뼈를 늘리는 수술까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에 가득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세계를 목격한 나. 그저 개성으로만 여겼던 엄지가 누군가에겐 어둠이라는 사실이 기묘했다. 나의 밝은 날들은 당연하지 않았다.
다시 최초의 따뜻한 발견을 떠올려본다. 순간 마음 속으로 날아온 말 덕분에 푸르른 들판이 되어 지금까지 내 손은 구석으로 숨은 적이 없었다. 누군가 어린 내 손가락을 보고 '어머 왜 이렇게 됐어?'라는 한 마디로 뾰족하게 찔렀더라면, 나 또한 땅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고 구름이 발 밑으로 깔린 세상에서 잔뜩 쪼그라들었을 텐데.
새하얀 소라 껍데기를 귀에 가져다 대고 집채 만한 파도 소리를 상상하듯, 내 짧은 손가락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무채색으로 위축된 마음을 아주 약간,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이들은 너무나 많아서 어떤 시선에서든 닿을 수 있지만 번번히 놓칠 때가 더 많다. 그에게 파릇파릇한 씨앗을 불어 넣으려 주머니 가득 담아 기회를 엿보다, 기다렸다는 듯 잔뜩 전해줘야지.
'발가락이 손에 달렸다'는 어릴 적 내 말이 아직도 또렷하다며 엄마는 웃었다. 때마침 엄마 친구의 엄지도 나처럼 짧았는데, 정말 재주가 많았던 게 떠올랐다고. 바람에 기다랗게 커튼이 날리는 교실 안, 재주꾼 친구의 손가락을 관찰하는 교복 입은 엄마를 상상하며 내가 가진 능력은 얼마나 되는지 세어본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손 덕분이니까. 내 엄지 손가락은 아주 귀엽고 멋지다.
group XMZ여자들 : https://omn.kr/group/XMZ2023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