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의 마법사→기업 부회장…최희암 “교만했던 나, 겸손하니 성공” [이헌재의 인생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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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 16:05
코트의 마법사에서 기업인으로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이 KSS용법으로 특허를 받은 자사의 ‘띠 철근’을 설명하고 다. 이헌재 기자 [email protected]
최희암(69) 하면 여전히 연세대 농구 감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1986년부터 17년간 연세대 지휘봉을 잡은 최 감독은 대학과 실업팀이 모두 참가한 농구대잔치에서 팀을 두 차례나 정상으로 이끈 ‘명장(名將)]이었다.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등이 활약한 연세대는 1990년대 최강이자 최고의 인기 팀이었다.
최 감독은 이후 프로농구 현대모비스와 전자랜드의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프로 감독으로서의 존재감은 딱히 두드러지지 않았다. 약체였던 전자랜드를 계약 마지막 해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 것 정도다.
전자랜드 감독 시절의 최희암 감독. 연세대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최하위였던 전자랜드를 2009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동아일보 DB
‘코트의 마법사’로 한국 농구에 큰 획을 그었던 최 감독은 현재 고려용접봉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9년 이 회사 중국 다롄의 중국 지사장으로 시작했으니 올해로 16년째다. 2014년 귀국한 뒤 부사장과 사장을 거쳐 부회장 자리까지 올랐다. 얼마 전까지 생산과 판매, 관리 등을 모두 총괄하다가 최근에는 대외업무와 영업, 신사업 개발 등을 맡고 있다. 서울 중구 본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건설 현장, 조선소, 자동차 공장 등 쇠가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든 우리 제품이 필요하다”며 “최근 ‘KSS’ 공법으로 내진 성능을 높인 ‘띠 철근’을 만들어 특허를 받았다. 지진이 났을 때 건물이 한 번에 무너지는 걸 막아주는 획기적인 제품”이라고 말했다.
평생을 코트에서 살아온 그는 전자랜드 감독직을 그만둔 후 당시 구단주였던 홍봉철 대표의 친형인 홍민철 고려용접봉 회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농구팀을 이끈 리더십으로 사람을 관리하고 성과를 내 보라”는 것이었다. 일 주일간의 고민 끝에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한 달 교육을 받고 그해 11월 곧바로 다롄 지사장으로 부임했다. 최 부회장은 “농구팀은 승리라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 상명하달의 분위기가 강하지만, 선수들 역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며 “그렇지만 기업에서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해야 했다. 모든 걸 배운다는 자세로 솔선수범하며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려 했다”고 말했다.
최희암 감독은 전자랜드 감독이던 2008년 연세대 시절 서장훈과 다시 재회했다. 동아일보 DB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던 그는 공부로 연세대에 입학한 뒤 농구를 계속했지만 선수로는 끝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일찍 은퇴했다. 하지만 공부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덕에 직장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 농구 현대의 창단 멤버였던 그는 은퇴 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수입-통관 업무를 했고, 현대건설로 옮겨서는 구매 업무를 했다. 현대건설 시절엔 이라크 바그다드 공사현장에 1년간 파견도 나갔다. 그는 “운 좋게 어릴 때 직장생활을 해 본 덕에 이곳에서도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거 같다”며 “농구 감독 생활을 오래 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중국에서도 농구가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농구 감독 시절 그도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 살았다. 그는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오는 압박감은 경험해보지 않을 사람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경기 전 스트레스가 크지만 어쨌거나 경기를 치르면 이기건 지건 결과가 나오긴 한다”고 했다.
이에 비해 기업이라는 건 한 방에 끝나는 게 없는 장기전이라는 차이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일일판매가 모여 월 판매가 되고, 월 판매가 모여 연간 실적이 된다. 365일이 은근한 스트레스다. 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최 부회장은 또 “농구는 그나마 시즌을 치르기 전 준비할 때가 좋다. 희망도 있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시즌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시즌이 있다”며 “반면 기업은 한 번 망하면 다음이라는 게 없다. 살면서 느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는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 농구대잔치 우승후 넷 커팅을 하고 있는 연세대 선수들. 최희암 제공
대학 감독 시절 누구도 이루지 못한 큰 성과를 냈던 그가 프로 감독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그는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최고”라는 마음이 강하다 보니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전의 성공에 취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또 프로농구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 활용에 대해서도 올바른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고 했다.
농구 감독으로의 실패는 ‘기업인’ 최희암에게는 훌륭한 공부가 됐다. 최 부회장은 기업인으로 변신한 이후 겸손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는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용접이라는 걸 처음 접했으니 주위의 모든 분이 내게는 스승이고 선생님이었다. 처음 1년 동안 모르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2년 차부터는 창피해지고 싶지 않았다. 낮은 자세로 차근차근 배우다 보니 점점 시행착오가 줄어 들었다”고 했다.
2021년 제1회 용접의 날 행사에서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오른쪽)이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을 수상하고 있다. 고려용접봉 제공
기업인이 된 후 그는 원래도 없던 시간이 더 없어졌다. 따로 운동할 시간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가 하는 거의 유일한 운동은 골프다. 주중에는 회사 일을 하고, 골프는 대개 주말에 친다.
최 부회장은 “중국 지사장 시절 거래처 관리를 위해 본격적으로 골프를 쳤다. ‘다 필요 없고 나랑 한 달에 한 번 골프만 치면 된다’는 현지 조선소 사장도 있었다”며 “귀국한 뒤에도 창원 공장 책임자로 일할 때 사업상 골프를 자주 쳤다”고 했다.
농구 감독 시절 1년에 한두 번 골프장에 나갈까 말까 했던 그로서는 엄청난 변화다. 딱히 연습을 하지 않아도 워낙 자주 치다 보니 80대 중반~90대 초반 스코어를 낸다. 그는 “골프장에서는 내가 인기가 참 많다. 오히려 잘 못 치니까 동반자들이 즐거워하고 더 좋아해 주시는 것 같다”며 웃었다.
그에게 골프장은 치는 곳이라기보다는 걷는 곳이다. 그는 “건강을 위해 하루에 8000보는 걷자고 마음을 먹는데 생각보다 실천이 쉽지 않다”면서 “그래도 골프장에 가면 카트를 타고 이동을 하는 경우가 있어도 1만 2000보는 쉽게 나온다”고 했다.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창원공장 시절 당시 창원시청 감독이던 박항서 전 베트남 대표팀 감독(오른쪽 끝)과 라운딩을 하는 모습. 최희암 제공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는 저녁 약속도 많고 식사 자리도 많다. 선수와 감독 시절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던 그도 기업인으로 일하면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종종 술자리를 갖는다. 그래도 틈틈이 몸을 움직이고 많이 걸으려고 노력한다.
회사 주변에서 회식을 한 뒤에는 자동차 대신 지하철을 주로 이용한다. 지하철에서 한두 정거장 일찍 내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이 있는 집까지 걸어간다. 창원 공장 시절에는 한 시간 정도 걸어 숙소까지 걷곤 했다.
이제는 농구 감독을 지냈던 시간과 기업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비슷해져 가고 있지만 최 부회장은 여전히 농구와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강원 홍천에서 열린 국제농구연맹(FIBA) 3X3 홍천 챌린저 2023의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농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지만 어떻게든 내가 도울 수 있는 한 돕고 싶다”고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그는 기업가로서 은퇴한 뒤의 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업상 이곳저곳을 많이 다니다 보니 우리나라에도 좋은 곳이 너무 많더라. 잠깐 여행이 아닌 ‘1년 살이’를 해당 지역에서 해 보고 싶다. 동해 도시에서 1년, 서해 도시에서 1년, 제주에서 1년 하는 식으로 여유 있게 그 지역의 모든 것을 느껴보고 싶다.”
최희암(69) 하면 여전히 연세대 농구 감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1986년부터 17년간 연세대 지휘봉을 잡은 최 감독은 대학과 실업팀이 모두 참가한 농구대잔치에서 팀을 두 차례나 정상으로 이끈 ‘명장(名將)]이었다.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등이 활약한 연세대는 1990년대 최강이자 최고의 인기 팀이었다.
최 감독은 이후 프로농구 현대모비스와 전자랜드의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프로 감독으로서의 존재감은 딱히 두드러지지 않았다. 약체였던 전자랜드를 계약 마지막 해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 것 정도다.
‘코트의 마법사’로 한국 농구에 큰 획을 그었던 최 감독은 현재 고려용접봉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9년 이 회사 중국 다롄의 중국 지사장으로 시작했으니 올해로 16년째다. 2014년 귀국한 뒤 부사장과 사장을 거쳐 부회장 자리까지 올랐다. 얼마 전까지 생산과 판매, 관리 등을 모두 총괄하다가 최근에는 대외업무와 영업, 신사업 개발 등을 맡고 있다. 서울 중구 본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건설 현장, 조선소, 자동차 공장 등 쇠가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든 우리 제품이 필요하다”며 “최근 ‘KSS’ 공법으로 내진 성능을 높인 ‘띠 철근’을 만들어 특허를 받았다. 지진이 났을 때 건물이 한 번에 무너지는 걸 막아주는 획기적인 제품”이라고 말했다.
평생을 코트에서 살아온 그는 전자랜드 감독직을 그만둔 후 당시 구단주였던 홍봉철 대표의 친형인 홍민철 고려용접봉 회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농구팀을 이끈 리더십으로 사람을 관리하고 성과를 내 보라”는 것이었다. 일 주일간의 고민 끝에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한 달 교육을 받고 그해 11월 곧바로 다롄 지사장으로 부임했다. 최 부회장은 “농구팀은 승리라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 상명하달의 분위기가 강하지만, 선수들 역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며 “그렇지만 기업에서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해야 했다. 모든 걸 배운다는 자세로 솔선수범하며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려 했다”고 말했다.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던 그는 공부로 연세대에 입학한 뒤 농구를 계속했지만 선수로는 끝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일찍 은퇴했다. 하지만 공부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덕에 직장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 농구 현대의 창단 멤버였던 그는 은퇴 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수입-통관 업무를 했고, 현대건설로 옮겨서는 구매 업무를 했다. 현대건설 시절엔 이라크 바그다드 공사현장에 1년간 파견도 나갔다. 그는 “운 좋게 어릴 때 직장생활을 해 본 덕에 이곳에서도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거 같다”며 “농구 감독 생활을 오래 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중국에서도 농구가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농구 감독 시절 그도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 살았다. 그는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오는 압박감은 경험해보지 않을 사람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경기 전 스트레스가 크지만 어쨌거나 경기를 치르면 이기건 지건 결과가 나오긴 한다”고 했다.
이에 비해 기업이라는 건 한 방에 끝나는 게 없는 장기전이라는 차이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일일판매가 모여 월 판매가 되고, 월 판매가 모여 연간 실적이 된다. 365일이 은근한 스트레스다. 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최 부회장은 또 “농구는 그나마 시즌을 치르기 전 준비할 때가 좋다. 희망도 있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시즌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시즌이 있다”며 “반면 기업은 한 번 망하면 다음이라는 게 없다. 살면서 느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는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 농구대잔치 우승후 넷 커팅을 하고 있는 연세대 선수들. 최희암 제공
대학 감독 시절 누구도 이루지 못한 큰 성과를 냈던 그가 프로 감독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그는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최고”라는 마음이 강하다 보니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전의 성공에 취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또 프로농구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 활용에 대해서도 올바른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고 했다.
농구 감독으로의 실패는 ‘기업인’ 최희암에게는 훌륭한 공부가 됐다. 최 부회장은 기업인으로 변신한 이후 겸손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는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용접이라는 걸 처음 접했으니 주위의 모든 분이 내게는 스승이고 선생님이었다. 처음 1년 동안 모르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2년 차부터는 창피해지고 싶지 않았다. 낮은 자세로 차근차근 배우다 보니 점점 시행착오가 줄어 들었다”고 했다.
2021년 제1회 용접의 날 행사에서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오른쪽)이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을 수상하고 있다. 고려용접봉 제공
기업인이 된 후 그는 원래도 없던 시간이 더 없어졌다. 따로 운동할 시간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가 하는 거의 유일한 운동은 골프다. 주중에는 회사 일을 하고, 골프는 대개 주말에 친다.
최 부회장은 “중국 지사장 시절 거래처 관리를 위해 본격적으로 골프를 쳤다. ‘다 필요 없고 나랑 한 달에 한 번 골프만 치면 된다’는 현지 조선소 사장도 있었다”며 “귀국한 뒤에도 창원 공장 책임자로 일할 때 사업상 골프를 자주 쳤다”고 했다.
농구 감독 시절 1년에 한두 번 골프장에 나갈까 말까 했던 그로서는 엄청난 변화다. 딱히 연습을 하지 않아도 워낙 자주 치다 보니 80대 중반~90대 초반 스코어를 낸다. 그는 “골프장에서는 내가 인기가 참 많다. 오히려 잘 못 치니까 동반자들이 즐거워하고 더 좋아해 주시는 것 같다”며 웃었다.
그에게 골프장은 치는 곳이라기보다는 걷는 곳이다. 그는 “건강을 위해 하루에 8000보는 걷자고 마음을 먹는데 생각보다 실천이 쉽지 않다”면서 “그래도 골프장에 가면 카트를 타고 이동을 하는 경우가 있어도 1만 2000보는 쉽게 나온다”고 했다.
최희암 고려용접봉 부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창원공장 시절 당시 창원시청 감독이던 박항서 전 베트남 대표팀 감독(오른쪽 끝)과 라운딩을 하는 모습. 최희암 제공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는 저녁 약속도 많고 식사 자리도 많다. 선수와 감독 시절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던 그도 기업인으로 일하면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종종 술자리를 갖는다. 그래도 틈틈이 몸을 움직이고 많이 걸으려고 노력한다.
회사 주변에서 회식을 한 뒤에는 자동차 대신 지하철을 주로 이용한다. 지하철에서 한두 정거장 일찍 내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이 있는 집까지 걸어간다. 창원 공장 시절에는 한 시간 정도 걸어 숙소까지 걷곤 했다.
이제는 농구 감독을 지냈던 시간과 기업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비슷해져 가고 있지만 최 부회장은 여전히 농구와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강원 홍천에서 열린 국제농구연맹(FIBA) 3X3 홍천 챌린저 2023의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농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지만 어떻게든 내가 도울 수 있는 한 돕고 싶다”고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그는 기업가로서 은퇴한 뒤의 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업상 이곳저곳을 많이 다니다 보니 우리나라에도 좋은 곳이 너무 많더라. 잠깐 여행이 아닌 ‘1년 살이’를 해당 지역에서 해 보고 싶다. 동해 도시에서 1년, 서해 도시에서 1년, 제주에서 1년 하는 식으로 여유 있게 그 지역의 모든 것을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