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 장암면 103세 어르신의 장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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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 17:09
김양한 어르신, 평생 삼시세끼 검은콩밥 식사... 자식들에게 "조금 손해 보는 듯 살아라" 늘 당부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 세기를 살아 낸 마을의 어르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적당히 눈이 내려 고고한 동양화 세상이었다. 백 세 시대, 백 세 인생 등의 말이 흔한 세상이지만 실제 사람이 백 살까지 살기까지는 그리 쉽지 않다.
생의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질곡을 헤쳐가며 백 년을 살아왔을 때는 뭔가 남다른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달리 비법이 없어도 백 세 인생만으로도 자손들과 주위 사람들의 축복을 받아야 할 생을 살고 계신 것은 분명하다.
부여군 장암면 합곡리 합하마을에는 1922년생으로 103번째 새해를 맞이하는 김양한 어르신이 살고 계셨다. 김양한 어르신은 인지 기능도 정상이고 지금도 혼자 식사를 해결하며 살고 계실 정도로 건강한 편이다. 낮에는 요양 보호사가 다녀 가지만 지금까지 혼자 생활이 가능할 정도이다.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셔서 밥을 해놓으시고는 저를 깨우는데 당신께서는 벌써 아침을 드셨더라구요. 평생 일정한 시간에 삼시세끼를 검은콩밥 한 공기를 드셨어요. 주방에는 항상 검은콩 불린 것이 떨어지질 않아요. 청력은 많이 상실하셔서 귀에 가까이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들어요."
김양한 어르신은 3남3녀의 자녀를 두었다. 외지에 사는 자녀들은 순번을 정해 주말마다 내려와서 아버지를 보살피고 있다. 어르신을 대신하여 작은 아들인 김세동씨에게 어르신의 평소 생활 철학과 자녀들을 훈육할 때 항상 하셨던 말씀들을 새해 덕담으로 듣기로 했다.
김양한 어르신은 검버섯도 거의 없는 얼굴에 표정이 맺힌 데가 없이 순수해 아기 얼굴 같기도 했다. 1백세 넘도록 사는 동안 겪었을 파란만장한 삶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평안해 보였다.
"어르신은 고생하며 살지는 않으신 것 같아요."
"우리 동네는 들판이 넓은 지역이에요. 그 들판에 논이 좀 있어서 옛날에는 머슴을 두고 살았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부지런하셔서 농사철에는 어두컴컴한 새벽에 논에 나가시곤 했어요. 지금도 삽 한 자루를 어깨에 메고 논에 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선한데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요."
합곡리는 백마강의 비옥한 펄이 펼쳐진 곳이라 논 마지기깨나 가지고 사는 집들이 많았다. 쌀이 돈의 가치를 대신하고 경제의 근간이던 시절에는 논이 많은 집에서는 머슴을 두고 살았다.
"특별히 따로 챙겨 드시는 것은 없어요. 보리와 결명자, 유근피 등을 넣고 끓인 물을 항상 드시기는 하는데 그것이 특별하거나 비싼 건강식품은 아니잖아요. 그것 때문인지 아직까지 손목시계를 돋보기 없이 보셔요."
음식은 가리는 것은 없고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양을 먹는다. 주전부리(군것질)는 거의 하지 않는다. 음주는 즐기지 않지만 분위기가 되면 맥주와 막걸리는 마신다. 농사를 짓지 않게 되면서 항상 한낮에는 마을을 산책했고 작년부터는 뜰팡(뜨락)에 나와 앉아 햇볕을 쐬는 일광욕을 즐기는 것도 백 년을 살고 계신 비결인 것 같다고 작은아들은 말한다.
"어르신이 평소에 자녀들을 훈육할 때 항상 하셨던 말씀이 있었을 텐데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니 조금 손해 보는 듯 살고 절대로 송사를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르신이 자녀를 키우며 살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한국 전쟁을 치르고 치열한 경쟁과 경제 성장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때였다. 그 당시 한 발자국 느린 삶을 말씀하셨다니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부모가 항상 강조했던 말과 행동은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김세동씨와 형제들은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말을 존중하며 생활 철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저도 거래처와 법적 시비를 할 뻔한 적이 많았죠. 그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어요. 어려운 시기도 5년이 고비인 것 같아요. 그때 어려웠던 거래처들과 함께 고비를 넘겼더니 지금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저희 형제들은 괜찮아요. 올해 82세인 큰 형님도 퇴직 후에도 연장 근무의 기회가 생겨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어요."
10여 년 전, 버스 사고로 김양한 어르신의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뜨는 일이 발생했을 때에도 자녀들은 오히려 버스 기사를 위로하고 과실을 가리지 않는 합의를 했다고 한다. 졸지에 어머니와 아내를 잃은 가족의 슬픔과 아픔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지만 버스 기사의 삶도 존중해야 한다는 쪽으로 자녀들의 의견이 모인 결과였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김양한 어르신은 과식과 과욕을 부리지 않고 살아 온 분이었다. 평생 같은 시간에 일정한 양을 먹으며 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식욕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이겨내고 중용의 덕을 알고 실천하며 사는 분이다.
"젊은 시절 향교에서 전교를 역임하며 사회 활동을 하셔서 그런지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란 말씀도 많이 하셨죠. 어릴 적에는 그 말의 깊은 속뜻을 잘 몰랐어요. 살다 보니, 말보다는 진실하게 행동하고 살라는 뜻이었어요. 저희가 아버지의 일생을 돌아보면 주관이 뚜렷해서 행동을 가볍게 한 적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먼저 가시고 혼자 계셨어도 저희는 아버지를 믿고 걱정하지 않았어요."
뒤뜰 감나무에서 감을 따놓고 가져가라는 등의 전화를 자녀들에게 먼저 하곤 하는 어르신은 최근에는 마당에서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같이 놀아주는 일로 소일하고 계신다.
백 년을 살아 온 존재감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어르신을 만나고 오던 지난해 12월 30일, 노인들에게 막말을 했던 전력이 드러난 정치인이 사퇴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매년 마당 텃밭에 심는 상추는 줄어도 어르신의 일 세기의 생은 더 아름답게 빛나기를 기원한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 세기를 살아 낸 마을의 어르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적당히 눈이 내려 고고한 동양화 세상이었다. 백 세 시대, 백 세 인생 등의 말이 흔한 세상이지만 실제 사람이 백 살까지 살기까지는 그리 쉽지 않다.
생의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질곡을 헤쳐가며 백 년을 살아왔을 때는 뭔가 남다른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달리 비법이 없어도 백 세 인생만으로도 자손들과 주위 사람들의 축복을 받아야 할 생을 살고 계신 것은 분명하다.
▲ 부여군 장암면 최장수 어르신 1922년생 김양한 어르신. |
ⓒ 오창경 |
부여군 장암면 합곡리 합하마을에는 1922년생으로 103번째 새해를 맞이하는 김양한 어르신이 살고 계셨다. 김양한 어르신은 인지 기능도 정상이고 지금도 혼자 식사를 해결하며 살고 계실 정도로 건강한 편이다. 낮에는 요양 보호사가 다녀 가지만 지금까지 혼자 생활이 가능할 정도이다.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셔서 밥을 해놓으시고는 저를 깨우는데 당신께서는 벌써 아침을 드셨더라구요. 평생 일정한 시간에 삼시세끼를 검은콩밥 한 공기를 드셨어요. 주방에는 항상 검은콩 불린 것이 떨어지질 않아요. 청력은 많이 상실하셔서 귀에 가까이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들어요."
김양한 어르신은 3남3녀의 자녀를 두었다. 외지에 사는 자녀들은 순번을 정해 주말마다 내려와서 아버지를 보살피고 있다. 어르신을 대신하여 작은 아들인 김세동씨에게 어르신의 평소 생활 철학과 자녀들을 훈육할 때 항상 하셨던 말씀들을 새해 덕담으로 듣기로 했다.
김양한 어르신은 검버섯도 거의 없는 얼굴에 표정이 맺힌 데가 없이 순수해 아기 얼굴 같기도 했다. 1백세 넘도록 사는 동안 겪었을 파란만장한 삶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평안해 보였다.
"어르신은 고생하며 살지는 않으신 것 같아요."
"우리 동네는 들판이 넓은 지역이에요. 그 들판에 논이 좀 있어서 옛날에는 머슴을 두고 살았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부지런하셔서 농사철에는 어두컴컴한 새벽에 논에 나가시곤 했어요. 지금도 삽 한 자루를 어깨에 메고 논에 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선한데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요."
합곡리는 백마강의 비옥한 펄이 펼쳐진 곳이라 논 마지기깨나 가지고 사는 집들이 많았다. 쌀이 돈의 가치를 대신하고 경제의 근간이던 시절에는 논이 많은 집에서는 머슴을 두고 살았다.
"특별히 따로 챙겨 드시는 것은 없어요. 보리와 결명자, 유근피 등을 넣고 끓인 물을 항상 드시기는 하는데 그것이 특별하거나 비싼 건강식품은 아니잖아요. 그것 때문인지 아직까지 손목시계를 돋보기 없이 보셔요."
음식은 가리는 것은 없고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양을 먹는다. 주전부리(군것질)는 거의 하지 않는다. 음주는 즐기지 않지만 분위기가 되면 맥주와 막걸리는 마신다. 농사를 짓지 않게 되면서 항상 한낮에는 마을을 산책했고 작년부터는 뜰팡(뜨락)에 나와 앉아 햇볕을 쐬는 일광욕을 즐기는 것도 백 년을 살고 계신 비결인 것 같다고 작은아들은 말한다.
"어르신이 평소에 자녀들을 훈육할 때 항상 하셨던 말씀이 있었을 텐데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니 조금 손해 보는 듯 살고 절대로 송사를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르신이 자녀를 키우며 살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한국 전쟁을 치르고 치열한 경쟁과 경제 성장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때였다. 그 당시 한 발자국 느린 삶을 말씀하셨다니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부모가 항상 강조했던 말과 행동은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김세동씨와 형제들은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말을 존중하며 생활 철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저도 거래처와 법적 시비를 할 뻔한 적이 많았죠. 그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어요. 어려운 시기도 5년이 고비인 것 같아요. 그때 어려웠던 거래처들과 함께 고비를 넘겼더니 지금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저희 형제들은 괜찮아요. 올해 82세인 큰 형님도 퇴직 후에도 연장 근무의 기회가 생겨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어요."
10여 년 전, 버스 사고로 김양한 어르신의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뜨는 일이 발생했을 때에도 자녀들은 오히려 버스 기사를 위로하고 과실을 가리지 않는 합의를 했다고 한다. 졸지에 어머니와 아내를 잃은 가족의 슬픔과 아픔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지만 버스 기사의 삶도 존중해야 한다는 쪽으로 자녀들의 의견이 모인 결과였다.
▲ 붓글씨를 잘 쓰는 김양한 님이 손주들에게 써 준 글 김양한 어르신이 부모님 계실 때 자식의 도리를 하라는 말씀을 한글 붓글씨로 써서 손주들에게 남겨 주었다. |
ⓒ 오창경 |
이야기를 듣다 보니 김양한 어르신은 과식과 과욕을 부리지 않고 살아 온 분이었다. 평생 같은 시간에 일정한 양을 먹으며 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식욕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이겨내고 중용의 덕을 알고 실천하며 사는 분이다.
"젊은 시절 향교에서 전교를 역임하며 사회 활동을 하셔서 그런지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란 말씀도 많이 하셨죠. 어릴 적에는 그 말의 깊은 속뜻을 잘 몰랐어요. 살다 보니, 말보다는 진실하게 행동하고 살라는 뜻이었어요. 저희가 아버지의 일생을 돌아보면 주관이 뚜렷해서 행동을 가볍게 한 적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먼저 가시고 혼자 계셨어도 저희는 아버지를 믿고 걱정하지 않았어요."
뒤뜰 감나무에서 감을 따놓고 가져가라는 등의 전화를 자녀들에게 먼저 하곤 하는 어르신은 최근에는 마당에서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같이 놀아주는 일로 소일하고 계신다.
백 년을 살아 온 존재감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어르신을 만나고 오던 지난해 12월 30일, 노인들에게 막말을 했던 전력이 드러난 정치인이 사퇴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매년 마당 텃밭에 심는 상추는 줄어도 어르신의 일 세기의 생은 더 아름답게 빛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