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시켜 놓고는 온종일 앉아 있다고 컵 던지다니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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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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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6 16:40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하루 몸값 500원 시절 다방 풍경
국산 커피가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국내 커피 소비시장 점유율 50%를 돌파한 것이 1971년이었다. 통행금지가 엄격했고, 머리가 길어도 치마가 짧아도 경찰이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시민의 가방이나 핸드백을 경찰들이 마구 뒤져도 항의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폭주하는 권력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다방이었다. 마을마다, 골목마다, 건물마다 있던 다방에서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사건과 사고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1971년 다방을 배경으로 벌어졌던 사건, 사고, 해프닝은 참 많고 다양했다.
3월 25일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중구 다동 모다방 홍모 마담을 상해 혐의로 입건했다. 그 전날 손님 정모씨가 차 한 잔 시켜 놓고 너무 오래 앉아 있다고 말다툼을 하다가 정씨의 얼굴에 물잔을 던져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힌 혐의였다. 정씨의 신고로 경찰에 잡혀간 홍마담은 "차 한잔 마시고는 온종일 앉아 있으니 영업방해가 아니냐?"고 기세를 부렸다고 한다.
비슷한 사건은 반복되었다. 5월 7일에는 종로에 있던 한 다방 김모 마담이 입건되었다. 김양은 차를 마시지 않고 나가던 장모 씨에게 "어디 이따위가 있느냐?"며 시비,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 장씨의 얼굴, 가슴 등을 때려 전치 1주의 상해를 입힌 혐의였다.
다방 사건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은 탈영병이었다. 3월 26일 새벽 6시쯤 대전 모부대 소속 김모 일병이 카빈소총을 들고 부대를 이탈하였다. 서울의 모 대학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씨는 등록금을 못 내 학교를 중퇴하고 입대했다.
입대 후 충주 시내 다방 레지로 있던 박모양과 사귀기 시작했으나 박양이 새로운 남자를 만나 갑자기 서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탈영을 한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박양을 만나러 서울에 온 김일병은 택시 기사와 요금 지불을 놓고 다툼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카빈소총을 난사해 택시 기사를 살해한 후 도피하다가 검거된 사건이었다.
5월 19일에는 대구에 있는 '77다실'에서 고모 일병이 부대 탄약고에서 빼낸 수류탄을 들고 13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하다가 어머니의 설득으로 자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난으로 진학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 오던 고일병이 훈련마저 힘들어지자 탈영하여 저지른 사건이었다. 따지고 보면 만연해 있던 가난과 일상화된 군대 폭력이 문제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사건
비슷한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8월 17일 밤 영등포에 있던 대호다방에서 칼빈소총을 든 10대 2명이 종업원과 손님 10여 명을 인질로 잡아 놓고, 3시간 이상 군경과 대치하면서 총을 쏘아대 일대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설득 작업을 하던 경찰관과 구경하던 행인 등 2명이 이들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었다.
결국 손님 두 명이 결투를 해서 범인들을 검거했다. 경찰보다 용감한 시민으로 표창을 받았다. 무모한 용기를 부추기는 사회, 생명의 고귀함을 접어둔 사회였다.
강원도 영월이 주소지였던 이들 10대 두 명은 마을 예비군 무기고에서 소총과 실탄을 훔쳐 서울로 올라온 후 대호다방에서 냉커피, 밀크, 홍차 등을 마시고 난 후 요금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벌어지면서 범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들의 범행 동기도 가난으로 인한 중학교 진학 포기, 이로 인한 반항심이었다. 두 명 중 김모군의 경우 형은 사범학교 진학 후 교사가 되었지만 자기는 경제적인 이유로 중학교 진학을 못 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이 컸다. 언론의 관심은 가난이나 빈부격차 문제가 아니라 예비군 무기고의 경비 강화였다.
뜨거웠던 이해 여름 신안군 자은면에서 나고 자라던 갓 스물 난 청년 박모군은 부푼 청운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하였다. 그런데 서울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학력이 없는 박군이 기댈 곳은 없었다. 결국 자포자기한 박군은 면도용 칼을 들고 을지로에 있던 '청호다방'에 뛰어들어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난동을 부렸다. 경찰에 잡혀 철창에 갇힌 박군은 눈물을 흘리며 "세상이 너무 매정하다"고 소리를 쳤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6월 24일에는 초등학교 교사 이모씨가 서울의 남대문에 있는 B다방 2층 계단에서 현금 6500원이 든 박모 여인의 핸드백을 날치기해 달아나다 행인에게 붙잡혀 입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천에서 13년간 교사 생활을 해오던 이씨는 중학교 2학년 딸의 등록금 7300원을 내지 못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제적시키겠다는 학교의 통지를 받았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던 이씨는 아내의 손목시계와 금반지, 처제의 금목걸이 등을 팔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박모 여인과 눈이 맞았다. 함께 다방으로 향하던 중 순간적으로 돈이 든 박여인의 핸드백에 욕심이 생겨 벌인 사건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사건이었다. 이씨는 경찰에서 "다시 건전한 새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읍소했다고 한다. 부정(不正)한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부정(父情)이 낳은 부정(不淨)한 사건이었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세상'
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진풍경 중 하나는 즉결심판이었다. 머리가 긴 남자, 치마가 짧은 여자, 고성방가를 한 사람, 통행금지 위반자, 그리고 빽없는 노점상인이나 윤락여성 등이 경범죄 위반으로 즉결심판을 받는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속전속결로 심판이 끝나면 벌금형의 경우 본인이나 가족이 벌금을 내면 바로 풀려나왔다. 벌금을 못 내는 사람들은 다시 호송차에 실려 관할 경찰서로 되돌아가 하루 500원씩의 몸값을 쳐서 벌금 대신 구류를 살아야 했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세상'임을 실감하는 것이 즉결심판 현장이었다.
1971년 서울의 경우 15개 경찰서에서 하루 평균 1600여 명의 이른바 보안사범들이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이들에게 적용되는 법규는 경범죄처벌법에 규정된 47개 조항이 중심이지만 이 밖에도 수백 개의 각종 행정법규 및 세칙들이 적용되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행동 중에 여기에 걸리지 않을 행동이 거의 없었다. 거리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잘 부르면 버스킹이고 못 부르면 고성방가로 처벌 대상이었으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 재판이 즉결심판이었던 것이다.
서울 중구 초동에 있던 한 다방에서 일하던 레지 이모양은 밀린 월급 2만3000원을 받으러 갔다가 주인과 말다툼 끝에 서로 삿대질을 했는데 이양만 경찰에서 즉결심판에 넘겨져 3000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돈이 없는 이양은 6일간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경기도 파주군 문산리에 있던 'R다방'에서 레지 김모양이 단골 손님 이모씨에게 청자 담배 한 갑을 종이에 싸서 슬그머니 줬는데, 이를 지켜본 옆자리 손님이 나도 한 갑 달라고 하자 김양은 "댁은 처음 보는 손님이라 줄 수 없다"고 응대했다. 화가 치민 손님이 김양의 뺨을 때렸고, 김양은 손님을 물어뜯는 활극이 벌어졌다.
문제는 청자였다. 다방에서 담배를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 갑에 100원 하던 고급 담배 청자의 인기로 공급 부족이 심해지자 다방 업자들은 담배 판매상으로부터 한 갑에 110원 내지 120원에 사다가 단골손님들에게 100원에 파는, 말 그대로 밑지고 파는 장사를 감수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단골손님에게 청자 한 갑을 몰래 주는 것은 지켜보는 애연가를 화나게 할만한 일이었다.
이런 어수선한 세상에 독특한 사건도 벌어졌다. 1971년 9월 어느 날 고려대학교 한국민족사상연구회 소속 40여 명의 대학생들이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서 사치풍조 배격 궐기대회를 갖고 교문을 나서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고려대 학생들이 "사치와 향락은 망국의 근원"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며 외친 내용에는 "하이힐을 벗고 단화를 신어라, 다방으로 향하는 그대들의 발걸음을 서점으로 돌려라, 귀부인과 같은 그 손가락으로 쌀을 씻어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단한 오지랖이다. 경찰의 제지를 피한 이들 고려대 학생들은 인근에 있던 연세대 학생들과 합세해 교련강화 반대 데모를 벌였다.
이해 봄에는 미국 시애틀에 스타벅스 1호점이 문을 열었고, 남북적십자사는 이산가족 상봉에 극적으로 합의하였다. 남과 북은 1979년까지 실무회의, 예비회담, 본회담 등 회의만을 수십 차례 반복하였다. 정작 만나야 할 이산가족은 무시한 채 정치인들끼리의 만남만 반복되었다.
적대적 공생관계를 즐기던 남과 북 독재정권이 보여준 드라마였다. 모든 회담에서 이들이 마시는 음료는 커피였다. 마치 커피가 평화의 음료인 듯 보였다. 그러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1971년 기사.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역사비평.
▲ 1971년 3월 26일 자 <조선일보> 기사 "다방 오래 앉았다고 컵세례"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국산 커피가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국내 커피 소비시장 점유율 50%를 돌파한 것이 1971년이었다. 통행금지가 엄격했고, 머리가 길어도 치마가 짧아도 경찰이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시민의 가방이나 핸드백을 경찰들이 마구 뒤져도 항의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폭주하는 권력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다방이었다. 마을마다, 골목마다, 건물마다 있던 다방에서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사건과 사고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1971년 다방을 배경으로 벌어졌던 사건, 사고, 해프닝은 참 많고 다양했다.
3월 25일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중구 다동 모다방 홍모 마담을 상해 혐의로 입건했다. 그 전날 손님 정모씨가 차 한 잔 시켜 놓고 너무 오래 앉아 있다고 말다툼을 하다가 정씨의 얼굴에 물잔을 던져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힌 혐의였다. 정씨의 신고로 경찰에 잡혀간 홍마담은 "차 한잔 마시고는 온종일 앉아 있으니 영업방해가 아니냐?"고 기세를 부렸다고 한다.
비슷한 사건은 반복되었다. 5월 7일에는 종로에 있던 한 다방 김모 마담이 입건되었다. 김양은 차를 마시지 않고 나가던 장모 씨에게 "어디 이따위가 있느냐?"며 시비,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 장씨의 얼굴, 가슴 등을 때려 전치 1주의 상해를 입힌 혐의였다.
다방 사건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은 탈영병이었다. 3월 26일 새벽 6시쯤 대전 모부대 소속 김모 일병이 카빈소총을 들고 부대를 이탈하였다. 서울의 모 대학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씨는 등록금을 못 내 학교를 중퇴하고 입대했다.
입대 후 충주 시내 다방 레지로 있던 박모양과 사귀기 시작했으나 박양이 새로운 남자를 만나 갑자기 서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탈영을 한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박양을 만나러 서울에 온 김일병은 택시 기사와 요금 지불을 놓고 다툼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카빈소총을 난사해 택시 기사를 살해한 후 도피하다가 검거된 사건이었다.
5월 19일에는 대구에 있는 '77다실'에서 고모 일병이 부대 탄약고에서 빼낸 수류탄을 들고 13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하다가 어머니의 설득으로 자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난으로 진학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 오던 고일병이 훈련마저 힘들어지자 탈영하여 저지른 사건이었다. 따지고 보면 만연해 있던 가난과 일상화된 군대 폭력이 문제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사건
▲ 1971년 8월 18일 자 <경향신문> 기사 "광란 두 10대 경관 등 2명 사살"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비슷한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8월 17일 밤 영등포에 있던 대호다방에서 칼빈소총을 든 10대 2명이 종업원과 손님 10여 명을 인질로 잡아 놓고, 3시간 이상 군경과 대치하면서 총을 쏘아대 일대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설득 작업을 하던 경찰관과 구경하던 행인 등 2명이 이들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었다.
결국 손님 두 명이 결투를 해서 범인들을 검거했다. 경찰보다 용감한 시민으로 표창을 받았다. 무모한 용기를 부추기는 사회, 생명의 고귀함을 접어둔 사회였다.
강원도 영월이 주소지였던 이들 10대 두 명은 마을 예비군 무기고에서 소총과 실탄을 훔쳐 서울로 올라온 후 대호다방에서 냉커피, 밀크, 홍차 등을 마시고 난 후 요금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벌어지면서 범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들의 범행 동기도 가난으로 인한 중학교 진학 포기, 이로 인한 반항심이었다. 두 명 중 김모군의 경우 형은 사범학교 진학 후 교사가 되었지만 자기는 경제적인 이유로 중학교 진학을 못 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이 컸다. 언론의 관심은 가난이나 빈부격차 문제가 아니라 예비군 무기고의 경비 강화였다.
뜨거웠던 이해 여름 신안군 자은면에서 나고 자라던 갓 스물 난 청년 박모군은 부푼 청운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하였다. 그런데 서울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학력이 없는 박군이 기댈 곳은 없었다. 결국 자포자기한 박군은 면도용 칼을 들고 을지로에 있던 '청호다방'에 뛰어들어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난동을 부렸다. 경찰에 잡혀 철창에 갇힌 박군은 눈물을 흘리며 "세상이 너무 매정하다"고 소리를 쳤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6월 24일에는 초등학교 교사 이모씨가 서울의 남대문에 있는 B다방 2층 계단에서 현금 6500원이 든 박모 여인의 핸드백을 날치기해 달아나다 행인에게 붙잡혀 입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천에서 13년간 교사 생활을 해오던 이씨는 중학교 2학년 딸의 등록금 7300원을 내지 못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제적시키겠다는 학교의 통지를 받았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던 이씨는 아내의 손목시계와 금반지, 처제의 금목걸이 등을 팔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박모 여인과 눈이 맞았다. 함께 다방으로 향하던 중 순간적으로 돈이 든 박여인의 핸드백에 욕심이 생겨 벌인 사건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사건이었다. 이씨는 경찰에서 "다시 건전한 새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읍소했다고 한다. 부정(不正)한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부정(父情)이 낳은 부정(不淨)한 사건이었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세상'
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진풍경 중 하나는 즉결심판이었다. 머리가 긴 남자, 치마가 짧은 여자, 고성방가를 한 사람, 통행금지 위반자, 그리고 빽없는 노점상인이나 윤락여성 등이 경범죄 위반으로 즉결심판을 받는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속전속결로 심판이 끝나면 벌금형의 경우 본인이나 가족이 벌금을 내면 바로 풀려나왔다. 벌금을 못 내는 사람들은 다시 호송차에 실려 관할 경찰서로 되돌아가 하루 500원씩의 몸값을 쳐서 벌금 대신 구류를 살아야 했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세상'임을 실감하는 것이 즉결심판 현장이었다.
1971년 서울의 경우 15개 경찰서에서 하루 평균 1600여 명의 이른바 보안사범들이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이들에게 적용되는 법규는 경범죄처벌법에 규정된 47개 조항이 중심이지만 이 밖에도 수백 개의 각종 행정법규 및 세칙들이 적용되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행동 중에 여기에 걸리지 않을 행동이 거의 없었다. 거리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잘 부르면 버스킹이고 못 부르면 고성방가로 처벌 대상이었으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 재판이 즉결심판이었던 것이다.
서울 중구 초동에 있던 한 다방에서 일하던 레지 이모양은 밀린 월급 2만3000원을 받으러 갔다가 주인과 말다툼 끝에 서로 삿대질을 했는데 이양만 경찰에서 즉결심판에 넘겨져 3000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돈이 없는 이양은 6일간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경기도 파주군 문산리에 있던 'R다방'에서 레지 김모양이 단골 손님 이모씨에게 청자 담배 한 갑을 종이에 싸서 슬그머니 줬는데, 이를 지켜본 옆자리 손님이 나도 한 갑 달라고 하자 김양은 "댁은 처음 보는 손님이라 줄 수 없다"고 응대했다. 화가 치민 손님이 김양의 뺨을 때렸고, 김양은 손님을 물어뜯는 활극이 벌어졌다.
문제는 청자였다. 다방에서 담배를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 갑에 100원 하던 고급 담배 청자의 인기로 공급 부족이 심해지자 다방 업자들은 담배 판매상으로부터 한 갑에 110원 내지 120원에 사다가 단골손님들에게 100원에 파는, 말 그대로 밑지고 파는 장사를 감수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단골손님에게 청자 한 갑을 몰래 주는 것은 지켜보는 애연가를 화나게 할만한 일이었다.
▲ 1971년 9월 29일 자 <동아일보> 기사 "사치풍조 규탄데모 고대생들 이대앞서"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이런 어수선한 세상에 독특한 사건도 벌어졌다. 1971년 9월 어느 날 고려대학교 한국민족사상연구회 소속 40여 명의 대학생들이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서 사치풍조 배격 궐기대회를 갖고 교문을 나서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고려대 학생들이 "사치와 향락은 망국의 근원"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며 외친 내용에는 "하이힐을 벗고 단화를 신어라, 다방으로 향하는 그대들의 발걸음을 서점으로 돌려라, 귀부인과 같은 그 손가락으로 쌀을 씻어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단한 오지랖이다. 경찰의 제지를 피한 이들 고려대 학생들은 인근에 있던 연세대 학생들과 합세해 교련강화 반대 데모를 벌였다.
이해 봄에는 미국 시애틀에 스타벅스 1호점이 문을 열었고, 남북적십자사는 이산가족 상봉에 극적으로 합의하였다. 남과 북은 1979년까지 실무회의, 예비회담, 본회담 등 회의만을 수십 차례 반복하였다. 정작 만나야 할 이산가족은 무시한 채 정치인들끼리의 만남만 반복되었다.
적대적 공생관계를 즐기던 남과 북 독재정권이 보여준 드라마였다. 모든 회담에서 이들이 마시는 음료는 커피였다. 마치 커피가 평화의 음료인 듯 보였다. 그러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1971년 기사.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역사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