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반란군 총 맞은 운보 그림 ‘적영’의 파란만장 스토리[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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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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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5 08:03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서 하나회 출신들이 일으킨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겨울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영화는 44년 전 군사쿠데타가 벌어졌던 현장을 생생히 보여준다.
당시 반란군이 쏟아부었던 총탄에 다친 것은 군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사적 현장을 지켜보던 그림 몇 점도 반란군 총알에 구멍이 뚫리는 상처를 입었다. 운보 김기창 화백(1913~2001)의 작품 ‘적영(敵影)’과 박항섭 화백(1923~1979)의 작품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란민’ 등이 대표적이다.
내가 운보 작품이 반란군의 총탄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노무현 정부 때 국방부를 출입하면서였다. 당시 나는 김기창 화백이 그린 ‘적영’이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라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에 관심을 갖고 국방부 내 이곳저곳을 탐문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평소 나를 ‘막냇동생’처럼 대하던 안광찬 국방부 정책실장이 대뜸 “야, 박성진! 너 그거 알아? 그 그림이 12·12 때 총 맞았던 거”라고 하는 게 아닌가. 육사 25기 출신인 안 실장은 하나회 출신이었다. 그는 따르는 후배들이 많은 호쾌한 성품의 예비역 소장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부 고위공무원으로 발탁된 인사였다. 내가 “네?”라고 반문하자 그는 그림 속 맹호부대원의 눈동자 부분에 반란군의 총알이 관통했고, 이후 복원했다고 전해줬다.
이후 추가 취재를 하다가 옛 국방부 청사였던 구관 건물 벽에 남아 있는 총알 자국도 발견했다. 또 운보 그림뿐만 아니라 박항섭 화백의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란민’도 총탄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 12·12의 흔적이었다. 당시 운보 그림은 1발밖에 맞지 않았지만 박 화백의 그림은 상당히 많은 총알 세례를 받았고, 마찬가지로 복원작업을 거친 흔적이 있었다. 12·12 당시 국방부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청사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가장 치열했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곳에 걸려 있던 탓에 총알을 많이 맞았다.
12·12 현장을 지켜보다 총을 맞았던 운보의 작품 ‘적영’은 ‘적의 그림자’란 뜻이다. 이 작품은 크기가 가로 2m, 세로 3m일 정도로 대형이다. 한국군 부대의 베트남 파병 이후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베트남 638고지 전투, 일명 ‘안케 고개’ 전투를 묘사했다. 과거 기록을 조사해보니 운보는 1972년 6월 14일부터 7월 4일까지 베트남을 방문한 후 <월남전쟁기록화전>에 이 그림을 출품했다. 당시 국무위원들이 이 그림을 구입해 국방부에 기증하는 바람에 국방부 청사 현관에 걸리게 됐다고 한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5일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 나선 공군의 F-51 머스탱 전투기들의 활약상을 그림에 담아낸 운보의 호국화인 1972년 작 ‘초연’ / 대한민국 공군 제공
문제는 이 그림이 운보 자신의 대표적인 친일 작품인 ‘적진육박’을 자가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는 점이다. ‘적진육박’은 일제강점기 남양군도에서 대검을 소총에 끼우고 적진의 미군들을 향해 포복한 채 전진하는 일본군 모습을 묘사해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림이다. 밀림을 뚫고 포복하면서 전진하는 맹호부대 장병들의 모습이 운보의 대표적인 친일 작품인 ‘적진육박’과 너무나 유사하다. 이 때문에 그림 속 맹호부대원과 일본군은 군복만 다르게 입었을 뿐 똑같이 보인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적진육박’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전람회에서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았고, ‘소국민’이라는 어린이 잡지에도 사진으로 실렸다. 원화는 그러나 행방불명 상태였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국방부가 청사에서 ‘적영’ 그림을 철거하고 친일 연구를 위해 연구소에 기증해주도록 다리를 놔달라고 나에게 요청했다. 이후 정권의 향배와 관계없이 운보가 ‘친일파 화가’라는 논란은 있지만 예술성이나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전시해도 좋다, 다만 일제 군국주의 그림을 표절했다는 인상을 준다면 철거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와 칼럼을 줄기차게 썼다. 민족연구소 측의 인수 의사 역시 국방부 고위층에게 수차례 전달했으나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결국 운보의 ‘적영’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철거됐다. 나는 타사 기자 몇몇과 함께 참석한 서주석 당시 국방차관과의 국방컨벤션 만찬 자리에서 운보의 ‘적영’이 군의 정통성을 훼손할 소지가 있다는 얘기를 다시 한 번 전달했고, 서 차관의 결심으로 그림은 2018년 3월 전쟁기념관 수장고로 옮겨졌다.
‘적영’은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1992년) 이후 처음으로 2001년 팜반차 베트남 국방부 장관이 방한했을 때도 ‘뜨거운 감자’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혹시라도 팜반차 국방부 장관 일행이 청사를 걸으면서 현관 정면에 보이는 그림에 관심을 가지면 어떻게 하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림을 아예 치우기도 부담스러웠던 국방부가 아이디어를 하나 짜냈다. 작품의 배경을 설명한 ‘제목 동판’을 눈에 잘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포로 살짝 갈아냈다.
1·4후퇴 당시 대동강 철교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란민들을 그린 박항섭 화백의 작품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란민’ / 안보22 제공
이밖에도 군은 육·해·공군을 포함해 약 3400점의 미술작품을 보유 중이다. 여기에는 천경자 화백의 1972년도 작품인 ‘꽃과 병사와 포성’ 등 유명 화가의 작품도 상당수다. 공군이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미술작품은 베트남전에서 F-4 팬텀기 편대가 공대지 작전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운보의 1972년 작품 ‘초연’이다. 이 그림은 김종필 전 총리가 1972년 공군 11전투비행단에 기증한 작품이다. 공군은 상당한 세월을 거치면서 상태가 나빠진 이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 의뢰해 6개월간의 복원작업을 거치도록 했다. 이후 공군사관학교 본관으로 옮겼다.
한국 근현대 서양화 1세대 작가인 박항섭 화백의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란민’은 1·4후퇴 당시 가족을 북에 둔 채 본인만 남하한 데 따른 죄책감을 표출한 그림이다. 이 그림의 크기는 족히 200호가 넘어 세로는 성인 남자의 키보다 길다. 이 작품의 표면은 외부에 그대로 노출돼 일부는 색깔이 변한 상태다. 일부는 물감이 벗겨지고 있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에 ‘호국(기록)화’란 이름으로 역사적 전투 장면을 묘사한 미술작품을 전시하도록 독려했다. 윤건철 화백의 ‘통영상륙작전(1984년 작)’도 그중 하나다.
국방부가 다른 작품에 견줘 비교적 최근인 2006년부터 소장하고 있는 ‘칠준약진도(七駿躍進圖)’는 원로 동양화 작가인 신현조 화백이 3개월간의 작업 끝에 완성해 국방부에 기증한 그림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7마리의 말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육·해·공군 및 해병대, 예비군을 각각 상징하기도 하고 불굴의 의지를 나타내는 ‘7전 8기’의 의미도 담겨 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이처럼 군이 소장 중인 작품의 상당수는 과거 박정희 정권이나 군부독재 시절 국무위원들이 국군의 활약상을 묘사해 달라고 작가들에게 주문한 후 구입해 전달했거나 군이 작가들로부터 기증받은 작품들이다. 그러다 보니 화단에서는 작품성을 그다지 높게 쳐주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컬렉션이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미술 수집품을 뜻한다면 가히 ‘국방부 컬렉션’으로 부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