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외면한 노인우울증... '새벽 수다' 시작하고 달라졌다
자유인130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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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4 16:10
70대 할머니들의 온라인 수다 이야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평생을 이어온 교사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황혼 육아 10년 끝물에 코로나 펜데믹과 함께 기름기 빠진 몸과 마음이 병들기 시작했다. 의사는 노인 우울증이라며 세 가지를 처방해 주었다. 약 잘 먹기, 햇볕 좋은 시간에 공원 걷기, 그리고 감사 일기 쓰기였다. 말로만 듣던 우울증은 무서웠다. 한밤의 시간을 세기 시작했고 밥을 먹지 못하며 뾰족한 얼굴은 더욱 뾰족해지며 비틀거렸다. 남편은 스스로 서라고 무정히 밀어냈고 바쁜 자식들은 약 잘 먹으라며 전화를 끊었다. 난 말을 잃었다.
'내 인생 70년. 이게 뭐지?'
가족에 대한 서운함이 억울함으로 번지며 분노가 들끓었다. 말 보따리를 풀고 싶은데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끄적거리다 보니 글이 받아 주었다. 무엇인가 결정지을 매듭이 필요했다. 돌도 되지 않았던 손자와의 10년 생활. 그 때의 추억으로 아른대는 마음을 다잡고자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할머니가 보낸 편지 보고 울었어요."
손자도 울고 나도 울었다. 울보 할머니 모습을 보이기 싫어 글하고 놀은 지가 3년째다.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스스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넋두리나 반성문의 글을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에 여러 번 주저앉았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 어떤 글이 잘 쓴 글일까. 우문에 현답을 찾으려니 때때로 실망이 다가왔다.
그러던 차에 군산시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는 동네문화카페 교실을 두드렸다. 지도 선생이 제시한 10차시의 주제, 그리고 함께한 문우들과의 수다는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형태의 수다를 주워 담고 걸러야 했다. 종강이 되면서 그동안의 담금질 탓인지 문우들이 내 수다를 받아주기 시작했다. 신선한 샐러드의 아삭함처럼 상큼한 기운이 퍼지며 온몸을 곧추세워주었다.
송년과 함께 새해맞이에 인사를 주고받던 자리에서 신기한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일명 '새벽을 깨우는 글쓰기 수다'였다. 첫 수업은 섣달 첫 주 금요일 새벽 여섯 시. 처음으로 입장한 온라인 수다장, 페이스톡 알림소리가 낯설었다. 겨울아침 동창은 아직 멀리 있고, 새벽 창밖은 모두 자고 있는데 온라인 클래스 회원들은 빠짐없이 들어섰다. 전날 사전학습을 했지만 기계에 약한 70대 할머니들은 아이콘에 어리둥절했다. 비디오 모양의 단추가 무엇인 줄 모르고 마이크 모양의 역할도 몰랐다. 무조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고 쩔쩔맸다.
"이런 것 처음이야! 처음! 신기하다 정말."
앞머리를 그루프로 말아 뽕을 세우고 새벽 수다에 목소리가 설레어 흔들리는 양 선생. 이 수업에 들어오기 위해 아침산책을 새벽 4시로 옮겨 산에 갔다 왔다는 이 선생. 톡 튀어나온 이마를 더 반짝거리게 씻었는지 빛이 나던 정 원장. 눈 비비고 일어난 토끼처럼 눈이 떼꾼한 박 원장. 본 적이 없던 화장기 없는 맨얼굴들과 마주하면서 꾸밈없는 글에 대한 수다도 함께 만났다.
과제로 낸 각자의 글 작품을 보라는 지도 선생의 언급이 있었다. 창작 노트를 발표하고 질의 응답 시간이 끝나면서 총평이 이어졌다. 새로운 방법의 글쓰기 현장 '새벽을 깨우는 글쓰기 수다'에 같은 무늬를 가진 사람들의 유쾌한 새벽 수다는 어느새 무사히 날 샌 아침을 데려왔다.
처음으로 한 온라인 수업이라 그랬던지 혼자만의 이야기가 길어진다는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쌓이면 속병이 될까봐 그랬던지 모두들 열심히 토해냈다. '나도 말하고 싶다. 그만들 좀 혀!'라는 지인의 말에 뻘쭘하여 웃음꽃이 터졌다.
'호모사피엔스의 자체는 수다의 역사'라고 말한 것처럼 새벽 글쓰기 수다의 역사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새벽의 정기를 받아서 인지 막힌 혈관이 툭 터지며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수다의 사전적 정의는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 그런 말'이라고 적혀 있다. 혹자는 수다가 끝나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야 수다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새벽 수다는 쓸데 있는 말수이며 끝나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프랑스 철학자 돌뢰즈의 '아장스망'이라는 말이 맴돈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환경에 몸으로 부딪쳐가면서 잠자고 있는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무대'란다. 온라인 새벽 수다 무대에서 찾아낸 나의 즐거운 글쓰기 감각.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 풀리는 상쾌한 이야기 마당이다. 이곳의 티켓은 비싸다. 내가 주연 배우임으로 열심히 자료 찾고 어제 보다 나은 글을 가지고 가야만 즉흥적이 아닌 오래 연습된 공연을 할 수 있음으로.
덧붙이는 글 | 요즘 꼰대라는 미명 아래 노인들의 설 자리가 없다. 심지어는 음식점에서도 노인들 옆 자리는 피하는 현실이다. 젊은 사람들을 나무라기 전에 어른들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 옛 것만, 자기만 내 세우는 고집으로는 외롭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스승임으로 배우고 나눈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평생을 이어온 교사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황혼 육아 10년 끝물에 코로나 펜데믹과 함께 기름기 빠진 몸과 마음이 병들기 시작했다. 의사는 노인 우울증이라며 세 가지를 처방해 주었다. 약 잘 먹기, 햇볕 좋은 시간에 공원 걷기, 그리고 감사 일기 쓰기였다. 말로만 듣던 우울증은 무서웠다. 한밤의 시간을 세기 시작했고 밥을 먹지 못하며 뾰족한 얼굴은 더욱 뾰족해지며 비틀거렸다. 남편은 스스로 서라고 무정히 밀어냈고 바쁜 자식들은 약 잘 먹으라며 전화를 끊었다. 난 말을 잃었다.
'내 인생 70년. 이게 뭐지?'
가족에 대한 서운함이 억울함으로 번지며 분노가 들끓었다. 말 보따리를 풀고 싶은데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끄적거리다 보니 글이 받아 주었다. 무엇인가 결정지을 매듭이 필요했다. 돌도 되지 않았던 손자와의 10년 생활. 그 때의 추억으로 아른대는 마음을 다잡고자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할머니가 보낸 편지 보고 울었어요."
손자도 울고 나도 울었다. 울보 할머니 모습을 보이기 싫어 글하고 놀은 지가 3년째다.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스스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넋두리나 반성문의 글을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에 여러 번 주저앉았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 어떤 글이 잘 쓴 글일까. 우문에 현답을 찾으려니 때때로 실망이 다가왔다.
그러던 차에 군산시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는 동네문화카페 교실을 두드렸다. 지도 선생이 제시한 10차시의 주제, 그리고 함께한 문우들과의 수다는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형태의 수다를 주워 담고 걸러야 했다. 종강이 되면서 그동안의 담금질 탓인지 문우들이 내 수다를 받아주기 시작했다. 신선한 샐러드의 아삭함처럼 상큼한 기운이 퍼지며 온몸을 곧추세워주었다.
송년과 함께 새해맞이에 인사를 주고받던 자리에서 신기한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일명 '새벽을 깨우는 글쓰기 수다'였다. 첫 수업은 섣달 첫 주 금요일 새벽 여섯 시. 처음으로 입장한 온라인 수다장, 페이스톡 알림소리가 낯설었다. 겨울아침 동창은 아직 멀리 있고, 새벽 창밖은 모두 자고 있는데 온라인 클래스 회원들은 빠짐없이 들어섰다. 전날 사전학습을 했지만 기계에 약한 70대 할머니들은 아이콘에 어리둥절했다. 비디오 모양의 단추가 무엇인 줄 모르고 마이크 모양의 역할도 몰랐다. 무조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고 쩔쩔맸다.
▲ 새벽 수다 남들은 다 자고 있는 캄캄한 새벽, 70대 할머니들이 영상으로 하는 수다 이야기 |
ⓒ 강진순 |
"이런 것 처음이야! 처음! 신기하다 정말."
앞머리를 그루프로 말아 뽕을 세우고 새벽 수다에 목소리가 설레어 흔들리는 양 선생. 이 수업에 들어오기 위해 아침산책을 새벽 4시로 옮겨 산에 갔다 왔다는 이 선생. 톡 튀어나온 이마를 더 반짝거리게 씻었는지 빛이 나던 정 원장. 눈 비비고 일어난 토끼처럼 눈이 떼꾼한 박 원장. 본 적이 없던 화장기 없는 맨얼굴들과 마주하면서 꾸밈없는 글에 대한 수다도 함께 만났다.
과제로 낸 각자의 글 작품을 보라는 지도 선생의 언급이 있었다. 창작 노트를 발표하고 질의 응답 시간이 끝나면서 총평이 이어졌다. 새로운 방법의 글쓰기 현장 '새벽을 깨우는 글쓰기 수다'에 같은 무늬를 가진 사람들의 유쾌한 새벽 수다는 어느새 무사히 날 샌 아침을 데려왔다.
처음으로 한 온라인 수업이라 그랬던지 혼자만의 이야기가 길어진다는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쌓이면 속병이 될까봐 그랬던지 모두들 열심히 토해냈다. '나도 말하고 싶다. 그만들 좀 혀!'라는 지인의 말에 뻘쭘하여 웃음꽃이 터졌다.
'호모사피엔스의 자체는 수다의 역사'라고 말한 것처럼 새벽 글쓰기 수다의 역사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새벽의 정기를 받아서 인지 막힌 혈관이 툭 터지며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수다의 사전적 정의는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 그런 말'이라고 적혀 있다. 혹자는 수다가 끝나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야 수다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새벽 수다는 쓸데 있는 말수이며 끝나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프랑스 철학자 돌뢰즈의 '아장스망'이라는 말이 맴돈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환경에 몸으로 부딪쳐가면서 잠자고 있는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무대'란다. 온라인 새벽 수다 무대에서 찾아낸 나의 즐거운 글쓰기 감각.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 풀리는 상쾌한 이야기 마당이다. 이곳의 티켓은 비싸다. 내가 주연 배우임으로 열심히 자료 찾고 어제 보다 나은 글을 가지고 가야만 즉흥적이 아닌 오래 연습된 공연을 할 수 있음으로.
덧붙이는 글 | 요즘 꼰대라는 미명 아래 노인들의 설 자리가 없다. 심지어는 음식점에서도 노인들 옆 자리는 피하는 현실이다. 젊은 사람들을 나무라기 전에 어른들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 옛 것만, 자기만 내 세우는 고집으로는 외롭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스승임으로 배우고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