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에게 삼성은 도구일 뿐 부강한 국가가 목표였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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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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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3 10:45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㊹]
●직원들이 상속세 고민할 만큼 돈 벌면 좋겠다
●이건희의 욕심은 명예에 있었다
●회사가 잘돼야 각자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
한용외 이사장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은 평소 “직원들, 사장들, 더 나아가 협력업체 사장과 직원들이 상속세를 고민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나는 사회 전반적 수준이 높아지도록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명예만 갖겠다”는 것을 자주 말했다고 한다.
배종렬 전 사장은 1990년부터 비서실에서 근무해 자연스럽게 이 회장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아직도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 말이 앞서 한 이사장도 언급한 “내게 필요한 것은 명예다. 나는 명예를 갖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배 전 사장 말이다.
“그 말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손들 잘살게 해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임직원을 위해서 그 열매를 나눠주고 당신은 ‘명예’를 갖는다는 큰 뜻을 품겠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삼성은 도구이고 진짜 목표는 부강한 국가라는 말도 하셨죠. 보통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꿈이 컸는데 이처럼 삼성의 존속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늘 고민한 분이었습니다.”
노 전 사장도 “회장님은 순도 99.9%로 평생 일에 대한 엄청난 집중과 몰두를 했는데 이건 삼성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이는 나올 수가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고 전했다.
이들의 말이 무게가 있는 것은 이 회장 스스로 생전에 그것도 1993년 신경영 선언 때 이미 자신이 삶에서 추구하는 것은 ‘명예’라는 걸 밝혔다는 점이다.
1993년 2월 미국 LA에서 열린 전자 관련 사장단 회의 발언이다.
“내가 내 재산 늘리려고 이렇게 밤잠 안 자고 떠드는 것 아니다. 재산 10배 늘어봐야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의 ‘이자의 이자의 이자’로도 나는 몇 대가 살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 자신이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이 아니다. 명예 때문이다. 성취감 때문이다. 성취감은 여러분, 삼성그룹, 우리나라가 잘되게 하는 것이다. 내 개인 양심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고 싶다.”
‘이자의 이자의 이자’로도 대대로 먹고살 수 있는 돈을 가진 재벌 총수가 추구한 것은 바로 명예였다는 것. 삼성 비서실에서 일했던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 말은 더 구체적이다.
“단언할 수 있는데 회장님은 개인의 돈 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삼성전자가 1994년 말부터 이익이 나지 않습니까. 한 달에 거의 천억씩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듬해에는 살림이 꽤 괜찮아졌죠. 제가 자금팀장을 할 때인데 그해 여름 프랑크푸르트에 갔는데 사모님도 오시고 자녀분들도 오셨죠.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편안했어요. 그래서인지 하루는 재무팀장이 회장께 ‘회장님 재산 변동 상황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회장이 ‘뭐할라꼬?’ 이러시는 데 실장이 ‘선대로부터 넘어온 이후에 재산 정리를 한 번도 안 하셨고, 제가 재무팀장을 맡은 이후에도 한 번도 재산 관계로 보고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정리를 해 갖고 왔습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회장이 ‘됐다’ 하며 보고를 물리셨어요.
이건희 회장이 돈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죠. 하지만 재벌 총수라고 하루에 여섯 끼를 먹겠습니까, 일곱 끼를 먹겠습니까, 명품 옷을 두 벌씩 껴입겠습니까, 잠을 두 번씩 잘 겁니까.
결국 의미나 가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나는 왜 일하는가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되는 거죠. 그것은 남한테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고 애국심일 수 있죠. 그런 점에서 보면 회장님은 남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 즉 명예를 제일 가치로 두었다는 게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는 걸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황 전 회장은 “그런 점에서 이 회장을 단순하게 ‘성공한 기업인’ 정도로 그려내면 너무나 작게 그리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늘 일밖에 모르셨으니 퍼스널 라이프가 행복했다고 보기엔 어렵죠. 골프도 한때는 잘 치셨고, 옛날엔 레슬링도 하시고, 탁구도 잘 치셨다고 하는데 나중엔 몸도 많이 안 좋아지셨고 운동도 많이 못 하시고. ‘왜 그렇게 살았을까?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마음이 누구라도 들죠.
하지만 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요. 후세들이 당신을 평가할 때, ‘아, 이분은 그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기업을 한 게 아니구나’ 이런 걸 듣고 싶었던 거죠. 다시 말해 삼성만 잘되는 것이 이분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걸 세상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해요.
삼성이란 건 당신이 도달할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란 거죠. 그게 뭐냐? 바로 기업의 수준을 높여 국가의 수준을 높이고 싶다는 목표였죠. 그분의 머릿속은 늘 삼성보다 더 큰 목표, 즉 ‘비욘드 삼성’이었다는 건 제가 옆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분명해요.”
“일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강하셨어요. 잠을 자지 않고 일을 챙겼으니까요. 제가 신대방동 살던 때인데 새벽에도 안양, 용인으로 부르셨어요.
그리고 누굴 뒤쫓아 따라가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일본을 따라가는 것도 싫고, 미국 따라가는 것도 싫고, 우리가 그들보다 시장을 먼저 선점해 따라오게 만들자, 여기서 성취감을 느끼셨던 거죠. 그러면서도 목적이 분명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은 막연하게 애국 애족하지만, 인류 공영공존이라는 단어를 잘 쓰셨어요.”
비서실장을 지낸 소병해 씨도 회장이 내놓은 비전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따라가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전한다(신경영실천위 책자).
“1988년 말경 일이다. 회장께서 ‘우리가 5000억 원의 이익을 내고 있다면 3년 이내에 1조 원 이익을 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에 대해 ‘과거 실적에 비추어보거나 현재 여건을 보아서 빠르면 5년, 아마 10년 정도는 걸려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영진이 현실 타협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 큰 전략도 전술도 기대할 수 없다, 큰 목표나 진취적 이상을 앞세워 강력한 실천 의지와 용기만 있다면 그 이상도 가능하지만, 어렵다는 생각이 앞서면 어떤 전략도 나올 수 없다’며 큰 생각을 가지라고 했다. 반도체라는 기회 선점을 위한 선행 투자와 시설 투자를 한 결과, 세계 최대 생산과 3조 원의 이익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 경영진의 안목을 키우기 위해 회장이 늘 강조하는 것이 ‘큰 것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큰 것을 봐야 큰 것을 볼 줄 알고, 보이게 된다. 큰 것이 보여야 우리 위치를 알게 되고 무슨 전략이 나오지 않겠는가? 지금 세계가 어떤지 보고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사장이나 임원들이 출장을 가면 정해진 업무 일정만 빡빡하게 짜고 기간도 줄이니, 극히 실무적 얘기만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출장은 갈 필요가 없다. 2~3일 여유를 더 잡아서 그 사회를 둘러보고 그 나라 인프라도 보고 박물관도 보아야 한다. 놀고 쉬라는 뜻이 아니라 공부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 나라 문화를 알게 되는 것이고 세계적 기업의 톱과도 대화가 될 것이 아닌가?’
회장은 어느 부문에서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취미생활이든 물건 구입이든, 건설이든 최고 일류로 시작부터 끝까지 한 번만이라도 해보아야 한다며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일류를 생각하고 일류로 실행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 결과도 일류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잣집에서 자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난 성격상 항상 무슨 일을 시작하면 최고, 최상으로 해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돈을 쓴다는 것을 단순히 낭비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돈을 써도 목적과 목표가 있으면 터득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고정웅 전 하쿠호도제일 사장은 홍보 일을 할 때 회장의 신년사 작성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회장이 정말 세상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삼성이 그냥 삼성이 아니고 한국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강조했는데 ‘최고다운 책임감을 꼭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삼성에 대해서는 가볍게 말하지 않게 삼성이 ‘쎄져서’ 일류로 강해져야 한다. 그러니 국내 1위로는 안 된다. 세계적 기업이 돼야 한다. 그래야 정부도 국민도 ‘삼성이 필요하다. 삼성이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2004년 재단총괄이 된 한용외 이사장은 2009년 12월까지 6년간 일하면서 한남동 리움미술관 개관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사실 현대미술관을 서울에 세우자는 프로젝트는 1995~96년 시작됐습니다. 용인에 호암미술관이 있지만 위치도 서울에서 멀고 소장품도 고미술 위주여서 서울 중심부에 현대미술관을 세워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많은 궁리를 하셨어요.
원래 부지는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근처인 운현궁 뒤쪽이었는데 부지 확보 문제 때문에 여의치 못했고 미 대사관 부지도 샀다가 고도제한을 받아 결국 한남동으로 가게 된 겁니다. 건물도 최고로 지어야 한다고 해서 전 세계 좋은 미술관을 다 둘러보며 벤치마킹했지요.
미술관에 대한 애정이 많으셔서 중요한 전시가 있으면 전시장을 미리 둘러보기도 하시고 디스플레이는 물론 작품 설명문까지 꼼꼼하게 체크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많은 지적을 당했는데 그런 때에도 개념이나 원리를 가지고 말씀을 하셨어요.
예를 들어 ‘설명문도 말로 하는 것처럼 보는 사람 머리에 쏙쏙 들어가기 쉽게 하되 정말 하고 싶은 얘기만 적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늘어놓고, 정작 말로 설명할 때는 내용과 다르게 요약해서 얘기한다면서 말이죠. 결국 관람객 입장에서 알기 쉽게 하라는 말씀이었죠.”
전시에 대한 지적도 세심하게 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도자기들은 빽빽하게 전시하면 안 되거든요. 작품 하나만 놓고도 조명을 집중해서 포인트가 돼야 하는데 그저 많이 보여주면 좋겠거니 하면 안된다는 거죠. 어느 날인가는 ‘지금 내놓은 거 반은 치워도 되겠다’ 하셨습니다. 방탄유리 유무까지 직접 묻고 확인하셨어요.
회장님이 처음 생각한 미술관의 용도는 세계적 기업가나 저명 인사, 미술애호가들이 왔을 때 문화나 예술 관련 얘기를 나누며 만찬 등을 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회장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선진 회사들과의 비즈니스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뭘까요.
“직접 들은 건데 세계적 기업가들을 만나면 일 얘기는 안 하고 미술, 음악 혹은 상대편 국가의 관심 분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꼭 얘기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자리가 파하기 전에 ‘오늘 참 유익한 시간이었는데, 돌아가시면 그 문제도 실무자들께 잘 검토시켜 주십시오.’ 이 정도가 딱 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삼성 CEO들에게도 문화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주문을 많이 하셨어요. 결국 비즈니스는 거래처, 더 나아가 소비자와의 정신적 교류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고 봅니다.
문화적 소양이 바탕이 돼야 비즈니스가 잘된다는 이야기는 결국 자기 혼자만의 독단적 사고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타인과 정신적 교류를 해야 일이 되는 것이라는 거죠. 저도 현장에서 외국 CEO들을 만나 비즈니스 협상을 할 때면 거래나 해당 사안에 대한 전략만이 아니라 문화적 소양이 큰 사람들이 많아 놀란 적이 많았습니다.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협상을 부드럽게 한다는 것도 많이 경험했고요.”
그는 회장의 또 다른 어록 중에서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이 있다며 이렇게 소개했다.
“신경영 선언 직후니까 지금으로부터 벌써 30년 전이에요. 승지원에서 사장단 회의를 하던 날 같아요. 앉아서 다른 얘기를 쭉 하시다가 갑자기 당신은 힘이 하나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회장은 평소 콜라를 좋아했는데 회의 중에 앞에 놓여 있던 콜라 잔을 들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시는 거예요. ‘내가 그룹 총수라고 하지만 무슨 능력이 있나. 갖다 주는 콜라 잔 정도 겨우 집어서 마실 정도의 힘밖에 없다, 내가 일하는 건 삼성이라는 큰 조직에 있는 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일을 하는 거다. 그래서 삼성의 업적이 내 업적이 되는 거다. 만약 내게 삼성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없다면 나는 이 콜라 잔, 요거 들 힘밖에 없다. 개인적 능력은 없다.’”
한 이사장은 이 말이 사장단을 향한 엄중한 경고로 들렸다고 했다.
“자만과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하라는 거죠. 당신들이 삼성 사장이라고 하니까 장관 같은 높은 사람들이 만나주는 거지, 그런 타이틀이 없다면 만나 주겠느냐. 당신들이 지금 똑똑하다고 난리를 쳐도 삼성전자 사장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 개인이라고 하면 나처럼 콜라 하나 들고 마실 힘밖에 안 되는 거다라는 의미였지요. 다시 말해서 능력이 아니라 직책이 일을 시켜주는 것이니 괜히 잘난 척하지 말고 겸손하게 잘 하라는 경고성 얘기로 저는 들었어요.”
이수빈 전 삼성생명 회장도 신경영실천위 책자에서 비슷한 에피소드를 전한다. 그의 말이다.
“1993년 오사카 신경영 회의 직후 나가사키에 있는 ‘네덜란드 민속촌’을 견학할 때 일이다. 정중하고도 친절한 안내를 받아가며 견학을 마친 우리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회장이 문득 ‘우리가 이렇게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것도 다 조직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도 삼성 회장으로 있으니 이런 대접을 받고 여러분도 그룹의 임원이니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데 삼성이라는 조직이 우리를 대접받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삼성이 잘돼야 우리들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 당시 회장의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한국 최고 기업인 삼성에서 성장하고 역량을 발휘해 온 바탕에는 아무래도 개인적 능력이 우선일 것이라는 자부심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가까운 동료나 친구들이 직장이나 공직을 떠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면서 새삼 회장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직장이나 공직에서 능력을 발휘하던 사람들이 개인 신분으로 돌아갔을 때 영향력, 권위, 대우 등에서 큰 차이가 생긴다.
결국 사람이 능력을 발휘하는 바탕이 그 사람의 개인적 능력보다도 조직의 힘과 사회적 지위에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됐고 회장 말씀의 깊은 뜻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1990년대 초로 기억된다. 중앙일보 간부들만 모인 자리였는데 회장이 참석자 모두에게 각자 할 말을 해보라고 했다. 모처럼의 기회여서 차례대로 이야기를 했다. 모두들 조심스러워했지만 더러 엉뚱한 소리도 있었고 중언부언하는 이도 있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상당히 시간이 걸렸지만, 회장은 중단시키지 않고 다 들었다. 한 차례가 다 돈 후 회장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중앙일보에서 가장 큰 빽이 누군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모두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인가 회장인가’. 대부분 그런 심정이었던 것 같다. 한참 만에 회장이 입을 열더니 이렇게 말했다. ‘중앙일보에서 가장 큰 빽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리고 말이 이어졌다. ‘내가 회장이지만 어느 누구를 어찌해 줄 수가 없다. 여러분 각자 하기에 따라서 역할이 결정되고 자리도 정해진다. 삼성에선 친인척 인사도 없고 정실 인사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또 다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 같으면 주눅이 들어 회장 앞에서 한마디도 못 하지만 그날은 분위기가 좋아 한마디하게 됐다. 회장에게 ‘너무 (저희들을) 야단을 치시니 모두들 매우 어려워합니다. 주눅이 들어있는 것 같으니 가끔은 칭찬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한참 가만히 듣고 있던 회장은 ‘섭씨와 화씨 같은 거지요’라고 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곰곰이 생각해 본즉 섭씨 0도가 화씨 32도와 같듯 야단치는 것도 다 차이가 있다는 말이었다.
늘 칭찬만 하면 그 칭찬에 별 뜻이 없어지고, 야단을 쳐도 그 속엔 격려의 뜻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회장은 ‘내가 야단을 치는 것은 그래도 희망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아예 포기한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라고 했다. 야단을 많이 맞으면 풀이 죽기 쉬운데, 희망을 갖고 더욱 분발하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한번은 한남동 회장 댁으로 가서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분위기가 무척 부드러웠지만 댁에서도 가족들에게 자상하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딘가 덤덤한 편이었다.
마침 분위기도 무르익고 해서 ‘회장님은 아드님을 어떻게 교육하십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가정교육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때는 5공 말기여서 데모가 극렬했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좀체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가끔 불러 물어보면 학교가 시끄러운 모양이더군. 서울대엔 어려운 사람이 많아 라면도 제대로 못 먹는 학생이 있는 모양이에요. 우리 애는 극부와 극빈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니 더러 힘들 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대로 원만히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것이고, 그 속에서 이겨나가야겠지요.’”
최 대표의 말은 여기서 끝난다.
평소 이 회장을 가까이 모셨던 사람들도 이건희 회장은 주변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을 걸거나 공감을 표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늘 거리를 두는 사람처럼 여겨져 대하는 게 늘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고 있구나 하는 믿음을 가져다주는 동력이기도 했다고 퇴임 임원들은 말했다.
●직원들이 상속세 고민할 만큼 돈 벌면 좋겠다
●이건희의 욕심은 명예에 있었다
●회사가 잘돼야 각자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추진 훨씬 이전부터 어린이집 사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어린이집을 세워서 엄마들을 육아로부터 해방시키면 맞벌이 가정이 늘어 소득이 늘 것이고 아이들도 전문교사에게 맡기면 교육효과가 높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기업이 어린이집 사업을 하는 것에 내외에서 반발이 많았다. 사진은 1990년 7월 서울시립 꿈나무어린이집 개원식 참석 모습. 오른쪽은 고건 당시 서울시장. [동아DB] |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찼던 ‘비욘드 삼성’
이 회장이 ‘명예’를 강조한 것과 관련해 그는 평소에 삼성을 대한민국 수준을 높이는 도구로 생각했다는 증언이 많다.배종렬 전 사장은 1990년부터 비서실에서 근무해 자연스럽게 이 회장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아직도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 말이 앞서 한 이사장도 언급한 “내게 필요한 것은 명예다. 나는 명예를 갖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배 전 사장 말이다.
“그 말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손들 잘살게 해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임직원을 위해서 그 열매를 나눠주고 당신은 ‘명예’를 갖는다는 큰 뜻을 품겠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삼성은 도구이고 진짜 목표는 부강한 국가라는 말도 하셨죠. 보통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꿈이 컸는데 이처럼 삼성의 존속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늘 고민한 분이었습니다.”
노 전 사장도 “회장님은 순도 99.9%로 평생 일에 대한 엄청난 집중과 몰두를 했는데 이건 삼성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이는 나올 수가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고 전했다.
이들의 말이 무게가 있는 것은 이 회장 스스로 생전에 그것도 1993년 신경영 선언 때 이미 자신이 삶에서 추구하는 것은 ‘명예’라는 걸 밝혔다는 점이다.
1993년 2월 미국 LA에서 열린 전자 관련 사장단 회의 발언이다.
“내가 내 재산 늘리려고 이렇게 밤잠 안 자고 떠드는 것 아니다. 재산 10배 늘어봐야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의 ‘이자의 이자의 이자’로도 나는 몇 대가 살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 자신이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이 아니다. 명예 때문이다. 성취감 때문이다. 성취감은 여러분, 삼성그룹, 우리나라가 잘되게 하는 것이다. 내 개인 양심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고 싶다.”
‘이자의 이자의 이자’로도 대대로 먹고살 수 있는 돈을 가진 재벌 총수가 추구한 것은 바로 명예였다는 것. 삼성 비서실에서 일했던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 말은 더 구체적이다.
“단언할 수 있는데 회장님은 개인의 돈 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삼성전자가 1994년 말부터 이익이 나지 않습니까. 한 달에 거의 천억씩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듬해에는 살림이 꽤 괜찮아졌죠. 제가 자금팀장을 할 때인데 그해 여름 프랑크푸르트에 갔는데 사모님도 오시고 자녀분들도 오셨죠.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편안했어요. 그래서인지 하루는 재무팀장이 회장께 ‘회장님 재산 변동 상황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회장이 ‘뭐할라꼬?’ 이러시는 데 실장이 ‘선대로부터 넘어온 이후에 재산 정리를 한 번도 안 하셨고, 제가 재무팀장을 맡은 이후에도 한 번도 재산 관계로 보고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정리를 해 갖고 왔습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회장이 ‘됐다’ 하며 보고를 물리셨어요.
이건희 회장이 돈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죠. 하지만 재벌 총수라고 하루에 여섯 끼를 먹겠습니까, 일곱 끼를 먹겠습니까, 명품 옷을 두 벌씩 껴입겠습니까, 잠을 두 번씩 잘 겁니까.
결국 의미나 가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나는 왜 일하는가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되는 거죠. 그것은 남한테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고 애국심일 수 있죠. 그런 점에서 보면 회장님은 남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 즉 명예를 제일 가치로 두었다는 게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는 걸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황 전 회장은 “그런 점에서 이 회장을 단순하게 ‘성공한 기업인’ 정도로 그려내면 너무나 작게 그리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늘 일밖에 모르셨으니 퍼스널 라이프가 행복했다고 보기엔 어렵죠. 골프도 한때는 잘 치셨고, 옛날엔 레슬링도 하시고, 탁구도 잘 치셨다고 하는데 나중엔 몸도 많이 안 좋아지셨고 운동도 많이 못 하시고. ‘왜 그렇게 살았을까?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마음이 누구라도 들죠.
하지만 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요. 후세들이 당신을 평가할 때, ‘아, 이분은 그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기업을 한 게 아니구나’ 이런 걸 듣고 싶었던 거죠. 다시 말해 삼성만 잘되는 것이 이분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걸 세상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해요.
삼성이란 건 당신이 도달할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란 거죠. 그게 뭐냐? 바로 기업의 수준을 높여 국가의 수준을 높이고 싶다는 목표였죠. 그분의 머릿속은 늘 삼성보다 더 큰 목표, 즉 ‘비욘드 삼성’이었다는 건 제가 옆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분명해요.”
큰 것을 봐야 큰 것을 볼 줄 안다
한편 42년간 삼성에서 일한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은 “이 회장은 애국애족이라는 말보다는 ‘인류 공영공존’이란 말을 썼다”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일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강하셨어요. 잠을 자지 않고 일을 챙겼으니까요. 제가 신대방동 살던 때인데 새벽에도 안양, 용인으로 부르셨어요.
그리고 누굴 뒤쫓아 따라가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일본을 따라가는 것도 싫고, 미국 따라가는 것도 싫고, 우리가 그들보다 시장을 먼저 선점해 따라오게 만들자, 여기서 성취감을 느끼셨던 거죠. 그러면서도 목적이 분명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은 막연하게 애국 애족하지만, 인류 공영공존이라는 단어를 잘 쓰셨어요.”
비서실장을 지낸 소병해 씨도 회장이 내놓은 비전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따라가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전한다(신경영실천위 책자).
“1988년 말경 일이다. 회장께서 ‘우리가 5000억 원의 이익을 내고 있다면 3년 이내에 1조 원 이익을 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에 대해 ‘과거 실적에 비추어보거나 현재 여건을 보아서 빠르면 5년, 아마 10년 정도는 걸려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영진이 현실 타협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 큰 전략도 전술도 기대할 수 없다, 큰 목표나 진취적 이상을 앞세워 강력한 실천 의지와 용기만 있다면 그 이상도 가능하지만, 어렵다는 생각이 앞서면 어떤 전략도 나올 수 없다’며 큰 생각을 가지라고 했다. 반도체라는 기회 선점을 위한 선행 투자와 시설 투자를 한 결과, 세계 최대 생산과 3조 원의 이익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 경영진의 안목을 키우기 위해 회장이 늘 강조하는 것이 ‘큰 것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큰 것을 봐야 큰 것을 볼 줄 알고, 보이게 된다. 큰 것이 보여야 우리 위치를 알게 되고 무슨 전략이 나오지 않겠는가? 지금 세계가 어떤지 보고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사장이나 임원들이 출장을 가면 정해진 업무 일정만 빡빡하게 짜고 기간도 줄이니, 극히 실무적 얘기만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출장은 갈 필요가 없다. 2~3일 여유를 더 잡아서 그 사회를 둘러보고 그 나라 인프라도 보고 박물관도 보아야 한다. 놀고 쉬라는 뜻이 아니라 공부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 나라 문화를 알게 되는 것이고 세계적 기업의 톱과도 대화가 될 것이 아닌가?’
회장은 어느 부문에서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취미생활이든 물건 구입이든, 건설이든 최고 일류로 시작부터 끝까지 한 번만이라도 해보아야 한다며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일류를 생각하고 일류로 실행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 결과도 일류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잣집에서 자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난 성격상 항상 무슨 일을 시작하면 최고, 최상으로 해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돈을 쓴다는 것을 단순히 낭비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돈을 써도 목적과 목표가 있으면 터득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고정웅 전 하쿠호도제일 사장은 홍보 일을 할 때 회장의 신년사 작성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회장이 정말 세상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삼성이 그냥 삼성이 아니고 한국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강조했는데 ‘최고다운 책임감을 꼭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삼성에 대해서는 가볍게 말하지 않게 삼성이 ‘쎄져서’ 일류로 강해져야 한다. 그러니 국내 1위로는 안 된다. 세계적 기업이 돼야 한다. 그래야 정부도 국민도 ‘삼성이 필요하다. 삼성이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리움미술관 세세하게 챙긴 이 회장의 뜻
리움미술관 전경. [동아DB] |
“사실 현대미술관을 서울에 세우자는 프로젝트는 1995~96년 시작됐습니다. 용인에 호암미술관이 있지만 위치도 서울에서 멀고 소장품도 고미술 위주여서 서울 중심부에 현대미술관을 세워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많은 궁리를 하셨어요.
원래 부지는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근처인 운현궁 뒤쪽이었는데 부지 확보 문제 때문에 여의치 못했고 미 대사관 부지도 샀다가 고도제한을 받아 결국 한남동으로 가게 된 겁니다. 건물도 최고로 지어야 한다고 해서 전 세계 좋은 미술관을 다 둘러보며 벤치마킹했지요.
미술관에 대한 애정이 많으셔서 중요한 전시가 있으면 전시장을 미리 둘러보기도 하시고 디스플레이는 물론 작품 설명문까지 꼼꼼하게 체크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많은 지적을 당했는데 그런 때에도 개념이나 원리를 가지고 말씀을 하셨어요.
예를 들어 ‘설명문도 말로 하는 것처럼 보는 사람 머리에 쏙쏙 들어가기 쉽게 하되 정말 하고 싶은 얘기만 적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늘어놓고, 정작 말로 설명할 때는 내용과 다르게 요약해서 얘기한다면서 말이죠. 결국 관람객 입장에서 알기 쉽게 하라는 말씀이었죠.”
전시에 대한 지적도 세심하게 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도자기들은 빽빽하게 전시하면 안 되거든요. 작품 하나만 놓고도 조명을 집중해서 포인트가 돼야 하는데 그저 많이 보여주면 좋겠거니 하면 안된다는 거죠. 어느 날인가는 ‘지금 내놓은 거 반은 치워도 되겠다’ 하셨습니다. 방탄유리 유무까지 직접 묻고 확인하셨어요.
회장님이 처음 생각한 미술관의 용도는 세계적 기업가나 저명 인사, 미술애호가들이 왔을 때 문화나 예술 관련 얘기를 나누며 만찬 등을 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회장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선진 회사들과의 비즈니스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뭘까요.
“직접 들은 건데 세계적 기업가들을 만나면 일 얘기는 안 하고 미술, 음악 혹은 상대편 국가의 관심 분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꼭 얘기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자리가 파하기 전에 ‘오늘 참 유익한 시간이었는데, 돌아가시면 그 문제도 실무자들께 잘 검토시켜 주십시오.’ 이 정도가 딱 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삼성 CEO들에게도 문화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주문을 많이 하셨어요. 결국 비즈니스는 거래처, 더 나아가 소비자와의 정신적 교류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고 봅니다.
문화적 소양이 바탕이 돼야 비즈니스가 잘된다는 이야기는 결국 자기 혼자만의 독단적 사고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타인과 정신적 교류를 해야 일이 되는 것이라는 거죠. 저도 현장에서 외국 CEO들을 만나 비즈니스 협상을 할 때면 거래나 해당 사안에 대한 전략만이 아니라 문화적 소양이 큰 사람들이 많아 놀란 적이 많았습니다.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협상을 부드럽게 한다는 것도 많이 경험했고요.”
그는 회장의 또 다른 어록 중에서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이 있다며 이렇게 소개했다.
“신경영 선언 직후니까 지금으로부터 벌써 30년 전이에요. 승지원에서 사장단 회의를 하던 날 같아요. 앉아서 다른 얘기를 쭉 하시다가 갑자기 당신은 힘이 하나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회장은 평소 콜라를 좋아했는데 회의 중에 앞에 놓여 있던 콜라 잔을 들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시는 거예요. ‘내가 그룹 총수라고 하지만 무슨 능력이 있나. 갖다 주는 콜라 잔 정도 겨우 집어서 마실 정도의 힘밖에 없다, 내가 일하는 건 삼성이라는 큰 조직에 있는 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일을 하는 거다. 그래서 삼성의 업적이 내 업적이 되는 거다. 만약 내게 삼성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없다면 나는 이 콜라 잔, 요거 들 힘밖에 없다. 개인적 능력은 없다.’”
한 이사장은 이 말이 사장단을 향한 엄중한 경고로 들렸다고 했다.
“자만과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하라는 거죠. 당신들이 삼성 사장이라고 하니까 장관 같은 높은 사람들이 만나주는 거지, 그런 타이틀이 없다면 만나 주겠느냐. 당신들이 지금 똑똑하다고 난리를 쳐도 삼성전자 사장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 개인이라고 하면 나처럼 콜라 하나 들고 마실 힘밖에 안 되는 거다라는 의미였지요. 다시 말해서 능력이 아니라 직책이 일을 시켜주는 것이니 괜히 잘난 척하지 말고 겸손하게 잘 하라는 경고성 얘기로 저는 들었어요.”
이수빈 전 삼성생명 회장도 신경영실천위 책자에서 비슷한 에피소드를 전한다. 그의 말이다.
“1993년 오사카 신경영 회의 직후 나가사키에 있는 ‘네덜란드 민속촌’을 견학할 때 일이다. 정중하고도 친절한 안내를 받아가며 견학을 마친 우리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회장이 문득 ‘우리가 이렇게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것도 다 조직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도 삼성 회장으로 있으니 이런 대접을 받고 여러분도 그룹의 임원이니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데 삼성이라는 조직이 우리를 대접받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삼성이 잘돼야 우리들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 당시 회장의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한국 최고 기업인 삼성에서 성장하고 역량을 발휘해 온 바탕에는 아무래도 개인적 능력이 우선일 것이라는 자부심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가까운 동료나 친구들이 직장이나 공직을 떠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면서 새삼 회장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직장이나 공직에서 능력을 발휘하던 사람들이 개인 신분으로 돌아갔을 때 영향력, 권위, 대우 등에서 큰 차이가 생긴다.
결국 사람이 능력을 발휘하는 바탕이 그 사람의 개인적 능력보다도 조직의 힘과 사회적 지위에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됐고 회장 말씀의 깊은 뜻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마련됐던 이건희 컬렉션을 둘러보는 시민들. 삼성가의 미술품 기증이야말로 최고 사회공헌사업의 하나였다. [동아DB] |
조직의 가장 큰 ‘빽’은 당신 자신
이 회장이 전한 이 말은 결국 믿을 것은 외부에서 주는 자리나 직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말로 들린다. 이와 관련해 신경영실천위원회 책자에 실린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원 대표도 비슷한 취지의 경험담을 들려준다.“1990년대 초로 기억된다. 중앙일보 간부들만 모인 자리였는데 회장이 참석자 모두에게 각자 할 말을 해보라고 했다. 모처럼의 기회여서 차례대로 이야기를 했다. 모두들 조심스러워했지만 더러 엉뚱한 소리도 있었고 중언부언하는 이도 있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상당히 시간이 걸렸지만, 회장은 중단시키지 않고 다 들었다. 한 차례가 다 돈 후 회장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중앙일보에서 가장 큰 빽이 누군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모두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인가 회장인가’. 대부분 그런 심정이었던 것 같다. 한참 만에 회장이 입을 열더니 이렇게 말했다. ‘중앙일보에서 가장 큰 빽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리고 말이 이어졌다. ‘내가 회장이지만 어느 누구를 어찌해 줄 수가 없다. 여러분 각자 하기에 따라서 역할이 결정되고 자리도 정해진다. 삼성에선 친인척 인사도 없고 정실 인사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또 다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 같으면 주눅이 들어 회장 앞에서 한마디도 못 하지만 그날은 분위기가 좋아 한마디하게 됐다. 회장에게 ‘너무 (저희들을) 야단을 치시니 모두들 매우 어려워합니다. 주눅이 들어있는 것 같으니 가끔은 칭찬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한참 가만히 듣고 있던 회장은 ‘섭씨와 화씨 같은 거지요’라고 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곰곰이 생각해 본즉 섭씨 0도가 화씨 32도와 같듯 야단치는 것도 다 차이가 있다는 말이었다.
늘 칭찬만 하면 그 칭찬에 별 뜻이 없어지고, 야단을 쳐도 그 속엔 격려의 뜻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회장은 ‘내가 야단을 치는 것은 그래도 희망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아예 포기한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라고 했다. 야단을 많이 맞으면 풀이 죽기 쉬운데, 희망을 갖고 더욱 분발하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한번은 한남동 회장 댁으로 가서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분위기가 무척 부드러웠지만 댁에서도 가족들에게 자상하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딘가 덤덤한 편이었다.
마침 분위기도 무르익고 해서 ‘회장님은 아드님을 어떻게 교육하십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가정교육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때는 5공 말기여서 데모가 극렬했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좀체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가끔 불러 물어보면 학교가 시끄러운 모양이더군. 서울대엔 어려운 사람이 많아 라면도 제대로 못 먹는 학생이 있는 모양이에요. 우리 애는 극부와 극빈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니 더러 힘들 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대로 원만히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것이고, 그 속에서 이겨나가야겠지요.’”
최 대표의 말은 여기서 끝난다.
평소 이 회장을 가까이 모셨던 사람들도 이건희 회장은 주변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을 걸거나 공감을 표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늘 거리를 두는 사람처럼 여겨져 대하는 게 늘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고 있구나 하는 믿음을 가져다주는 동력이기도 했다고 퇴임 임원들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