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Pick] 이순신과 왜 노량은 이순신의 죽음의 전장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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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2 17:03
이순신과 <노량: 죽음의 바다>
<노량: 죽음의 바다>가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10여 년 동안 염원에 가까운 마음으로 지금의 어지러운 세상에 이순신이란 인물을 알리고자 한 이는 단연 <명량>, <한산: 용의 출현>의 김한민 감독이다. 2023년 12월20일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로 장군이 숨지는 순간의 역사적 기록을 담았다.
용장과 지장, 그리고 ‘인간 이순신’
김한민 감독은 2014년 영화 <명량>으로 1,761만 명이라는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성적을 올렸다. 이 영화에서 김 감독은 ‘용장 이순신’을 그렸다. 1597년 10월26일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한 조선 수군을 이끌고 왜선 150여 척과 마주했다. 백의종군한 이순신 장군은 불과 12척으로 왜선 130척을 격침시켰다. 이 명량해전으로 조선은 전세를 역전할 수 있었다.<명량> 8년 후 김한민 감독은 2022년 <한산: 용의 출현>을 선보였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임에도 726만 명이 극장을 찾았다. 한산대첩은 명량해전에서 시간을 거슬러 1592년 8월14일에 벌어진 전투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불과 100일 후이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 전법으로 왜선 300여 척을 수장시켰다. 이 전투로 왜군은 남해에서 호남을 거쳐 서해로 진출,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산: 용의 출현>을 선보일 무렵, 김한민 감독은 <한산>과 이순신 3부작의 대미 <노량>을 동시에 구상하고, 제작했다.
노량해전은 1598년 12월16일 새벽에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당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주력 중 하나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군 300여 척.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단 한 명의 왜군도 돌려보낼 마음이 없었다. 그에게 ‘진정한 전쟁의 끝’은 ‘다시는 왜군이 조선을 넘보지 못할 마음과 지경’을 만드는 것이다. 칠천량에서 원균의 수군을 대파했던 시미즈 요시히로는 500여 척을 이끌고 고니시와 협공을 준비했다. 이에 맞서는 조선 수군은 판옥선 80척, 협선 100여 척에 수군 6,000명. 물론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의 300척 전선과 1만8,000명 수군이 있었지만 진린은 ‘끝난 전쟁에 더 이상 발을 담그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이 지점에서 김한민 감독은 고민했다고 한다. 전 국민이 다 아는 이순신의 죽음과 마지막 말을 어떻게 영화에 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터뷰에서 김한민 감독은 “사실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대사를 뺄지에 대해 고민했다. ‘오히려 빼는 게 참신하다는 얘기를 듣지 않을까’라는 얄팍한 생각을 했다가 ‘뺄 수는 없지’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김한민 감독은 10여 년간 ‘이순신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집착했던 이유와 결과를 <노량>에 담아야 했다. 해서 그는 <명량>에서는 불 같은 용장 이순신, <한산>에서는 물 같이 동요하지 않는 지장 이순신을 그려냈다.
그리고 <노량>의 이순신은 불과 물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그려냈다.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조선의 명운을 건 싸움에 임하는 장군으로서 각기 다른 각오와 면모가 보이는 캐릭터가 이 <노량>의 이순신이다.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노량해전 당시 삼국의 정세는 복잡했다. 조선은 7년 전쟁으로 약 400만 명의 군인과 백성이 전사하고 또 아사해 나라를 지탱하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선조는 빨리 전쟁을 끝내고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본 역시 복잡했다. 조선 주둔군은 승패는 결정 났다고 판단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안전한 철수였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철군을 반대했다. 해서 일본군은 조선 각처에 성을 쌓고 은거하며 철군만 기다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철수 명령이 내려왔다. 명나라 역시 대규모 원병을 파견했지만 나라 형편이 어려웠다. 만주족은 세력을 키우고 호시탐탐 명나라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고니시 유키나가는 철군만 시켜달라며 이순신과 진린에게 뇌물을 보냈다. 이순신은 대노했지만 진린은 이 부탁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이미 끝난 전쟁에 더 이상 희생하고 싶지 않던 것. 해서 진린은 이순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니시의 ‘제발 통신선만이라도 1척 왕래를 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고니시는 통신선을 시미즈에게 보냈다. 그러나 시미즈는 약 5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고니시와 협공할 계획을 세운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은 왜 그토록 치열하고 집요하게 죽기를 각오하고 이 노량해전에 임했을까. 영화에선 그가 “전쟁을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 일본까지 쫓아가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진린을 독려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물론 이 말은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의 정신을 추출해 만든 대사’이다. 영화에서 이순신은 말한다. “이 전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는 의와 불의의 싸움이다”라고 정의했다.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것도,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간 군주도, 원군으로 와 뇌물을 받고 적의 퇴로를 열어주자는 장군도 그에겐 불의이다. 이순신에게 ‘의’는 전쟁을 일으킨 자, 백성을 살육한 자가 온전히 철군해 다시 전쟁의 탐욕이 살아날 가능성을 뿌리 뽑는 것이다.
백의종군,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맑음. 아침을 먹고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종 순화가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해암으로 달려가니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려. 궂은 비.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 대어,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처절한 슬픔이다. 이순신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지극했다. 『난중일기』에 아버지를 언급한 것은 5회 내외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글은 100회 이상 나온다. 이순신에게 어머니는 지극한 사랑 그 자체였다. 노령의 병든 어머니가 그 험한 뱃길을 거슬러 자신을 만나러 오는 길에 돌아가신 것을 알았을 때 이순신은 ‘그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기록했다. 3년 상은 차치하고, 조선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막중한 임무도 그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했다. 어머니의 죽음 6개월 후 이순신은 12척의 전선으로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어 1597년 10월14일 『난중일기』 내용이다. ‘맑음.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헛디디어 내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끝에 아들 면이 엎디어 나를 안는 것 같은 형상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중략) ‘편지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겉봉을 뜯고 열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져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의 시신은 남해 관음포에 임시로 모셨다가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로 옮겼으며, 그해 말 시신을 육로로 고향 충남 아산에 운구했다. 그리고 1599년 2월 인근 금성산에 모셨다가 장군이 선무공신 좌의정 추증되자 광해군 때인 1614년 어라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1794년 정조는 장군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어제신도비를 하사했다.
[글 권이현(라이프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롯데엔터테인먼트]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13호(24.1.1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