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붐 세대의 그늘... 노인빈곤 문제가 절실합니다
자유인188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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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16:43
한국 경제의 초석을 놓았던 60~70대의 현재... 이들 얼굴에도 웃음꽃 피기를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새해가 밝은지도 며칠이 지났다. 저마다 새해에는 자신들의 소망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나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건강을 챙기자는 생각으로 많이 걸으려고 한다. 운동 삼아서 주로 인근에 있는 하천 산책로, 집 주변의 골목과 이면 도로를 자주 걷는다.
걷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스쳐 지나가는데, 가끔 골목이나 도로에서 폐지를 수레에 가득 실은 어르신을 보게 된다. 얼마나 폐지를 많이 싣고 다니는지 짐수레가 옆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위험해 보일 때도 있다. 뒤에서 밀어드리기도 하지만 짐수레보다 더 무거울 것 같은 어르신들의 고달픈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내 마음 한구석도 무겁고 착잡해진다.
어느 때부터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빈곤한 노인들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지만, 조금만 더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우리 주변에는 힘겨운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 주변에도 어려운 생활을 근근이 버티면서 살아가는 60~70대 이웃분들이 있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하면서 지낸다.
요즘 시대에 60~70대에 있는 분들은 일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신체적으로 건강을 장담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라서 개인에 따른 차이가 크다. 건강이 좋지 않아 쉬고 싶은데 가정 형편상 쉴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경제적으로 여의찮아서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이가 있다
절친한 이웃 아는 형님은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생업에 종사하고 계신다. 일반적인 직장의 정규직이라면 벌써 은퇴할 나이가 지났지만, 영세 기업의 일당제 형태의 육체노동자라 정년과 상관 없이 일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은퇴하지 않고 일해서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가 한 달 동안 일해서 받는 급여가 200만 원 남짓이라고 하니 거의 최저 임금 수준이다. 영세 업체의 생산 현장에서 일하고 받는 급여 수준이 어디를 가든 비슷하니 이직을 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고 한다. 50년 가까이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가정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이다.
게다가 그 분은 몇 년 전에 힘든 수술을 했다. 건강을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요양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몸이 불편한 형수님도 계시고 생계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다시 일터로 나갔다고 한다. 지금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하고 질병 상태를 검사받고 있다. 가끔 만날 때마다 "수술하고 나서는 힘이 달려서 일을 못 하겠어. 그만두고 싶은데 언제까지 해야 될지 모르겠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신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뻔한 위로의 말만 건넬 뿐,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 그분이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고 우울한 심경을 토로할 때는 듣고 있는 나도 괴롭다. 언제쯤 이웃 형님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편히 쉬면서 요양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팍팍한 인생살이가 딱하기만 하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 구하기 어려워
한편 친척 중에는 올해 70대에 접어드는 형님도 계시는데, 자녀들은 결혼해서 따로 살고, 부인과도 헤어져 혼자 생활하신다. 젊어서는 닥치는 대로 다양한 일에 종사했다. 철공소에도 다니고, 리어커 행상도 하고, 목욕탕 청소에다 공사판 막노동까지...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고 하신다. 이 친척 형님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부모님을 봉양하고 자녀들을 키우느라 힘든 세월을 보냈다. 고된 일에 비해 수입은 적다 보니 가정 살림을 꾸려 나가기도 빠듯하여 자신의 노후 대비할 여유는 없었다며, 가끔 찾아뵐 때마다 착잡한 속내를 내보이신다.
지금은 기초연금과 얼마 안 되는 국민연금을 받아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신다. 지병이 있어 60대 이후로는 육체적인 노동을 하기 어려워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에도 부족한 연금액이라 노인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여의치가 않다.
아들딸의 생활도 넉넉하지 않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단다. 생활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보니 비용이 들어가는 취미생활 같은 것은 꿈도 못 꾼다. 기껏해야 동네 주변을 맴돌거나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생활의 연속이다. 평상시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 혼자서 적적하게 보낸다니, 생계의 어려움에다 마음마저 쓸쓸해 보여 안타까울 따름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노년이 아름답고 행복했으면
위에서 말한 이웃 형님이나 친척 형님은 흔히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에 태어난 세대)의 맏형들로 농촌 출신이다. 나도 1963년생 농촌 출신, 베이비붐 세대의 막내로서 나보다 앞서 태어난 형과 누나들의 청소년기 이후 삶을 듣고 보면서 자랐다. 생각해보면 6.25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대부분 가정에서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생계에 급급하던 그때 농촌의 형과 누나들은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진학은 쉽지 않았고 대학 진학은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많은 농촌 출신의 형과 누나들은 어린 나이에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했다. '공돌이', '공순이'이라 불리며 산업 현장에서 저학력의 서러움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본인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그들의 청춘을 바쳤다. 결혼해서는 시골에 있는 가족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아들딸까지 대가족을 책임지는 어깨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는가. 그때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대다수 서민 가정의 형과 누나들의 삶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밑바탕에는 그 당시 형과 누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시간이 지나 이제 그분들이 60~70대 나이가 되었다. 저학력과 저임금의 상황에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음에도, 정작 본인들의 노후는 대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 저학력과 저임금의 여파는 늙어서도 이어져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건강을 위해 쉬고 싶어도 생계 때문에 일해야 하고, 생계를 위해 일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마음마저 쓸쓸해진다.
언제쯤 힘겨운 노년을 끝내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게 일자리이든 건강 복지이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한다. 우리나라 경제의 초석을 놓은 그분들이 시름을 내려놓고 편안한 노후를 맞이하는 그날이 오길 소망한다. 그분들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길 빌어본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새해가 밝은지도 며칠이 지났다. 저마다 새해에는 자신들의 소망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나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건강을 챙기자는 생각으로 많이 걸으려고 한다. 운동 삼아서 주로 인근에 있는 하천 산책로, 집 주변의 골목과 이면 도로를 자주 걷는다.
걷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스쳐 지나가는데, 가끔 골목이나 도로에서 폐지를 수레에 가득 실은 어르신을 보게 된다. 얼마나 폐지를 많이 싣고 다니는지 짐수레가 옆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위험해 보일 때도 있다. 뒤에서 밀어드리기도 하지만 짐수레보다 더 무거울 것 같은 어르신들의 고달픈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내 마음 한구석도 무겁고 착잡해진다.
어느 때부터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빈곤한 노인들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지만, 조금만 더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우리 주변에는 힘겨운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 주변에도 어려운 생활을 근근이 버티면서 살아가는 60~70대 이웃분들이 있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하면서 지낸다.
요즘 시대에 60~70대에 있는 분들은 일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신체적으로 건강을 장담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라서 개인에 따른 차이가 크다. 건강이 좋지 않아 쉬고 싶은데 가정 형편상 쉴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경제적으로 여의찮아서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이가 있다
▲ 보건복지부가 최근 '2023년 폐지 수집 노인 실태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생계 유지 등을 이유로 폐지를 줍는 65세 이상 노인은 4만2천명에 이르며 한 달에 16만원을 손에 쥐었다. 복지부는 오는 1월부터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지역 내 폐지 수집 노인을 전수조사한 후 이들에게 노인 일자리 등을 지원할 방침이다. |
ⓒ 연합뉴스 |
절친한 이웃 아는 형님은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생업에 종사하고 계신다. 일반적인 직장의 정규직이라면 벌써 은퇴할 나이가 지났지만, 영세 기업의 일당제 형태의 육체노동자라 정년과 상관 없이 일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은퇴하지 않고 일해서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가 한 달 동안 일해서 받는 급여가 200만 원 남짓이라고 하니 거의 최저 임금 수준이다. 영세 업체의 생산 현장에서 일하고 받는 급여 수준이 어디를 가든 비슷하니 이직을 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고 한다. 50년 가까이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가정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이다.
게다가 그 분은 몇 년 전에 힘든 수술을 했다. 건강을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요양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몸이 불편한 형수님도 계시고 생계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다시 일터로 나갔다고 한다. 지금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하고 질병 상태를 검사받고 있다. 가끔 만날 때마다 "수술하고 나서는 힘이 달려서 일을 못 하겠어. 그만두고 싶은데 언제까지 해야 될지 모르겠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신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뻔한 위로의 말만 건넬 뿐,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 그분이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고 우울한 심경을 토로할 때는 듣고 있는 나도 괴롭다. 언제쯤 이웃 형님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편히 쉬면서 요양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팍팍한 인생살이가 딱하기만 하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 구하기 어려워
한편 친척 중에는 올해 70대에 접어드는 형님도 계시는데, 자녀들은 결혼해서 따로 살고, 부인과도 헤어져 혼자 생활하신다. 젊어서는 닥치는 대로 다양한 일에 종사했다. 철공소에도 다니고, 리어커 행상도 하고, 목욕탕 청소에다 공사판 막노동까지...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고 하신다. 이 친척 형님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부모님을 봉양하고 자녀들을 키우느라 힘든 세월을 보냈다. 고된 일에 비해 수입은 적다 보니 가정 살림을 꾸려 나가기도 빠듯하여 자신의 노후 대비할 여유는 없었다며, 가끔 찾아뵐 때마다 착잡한 속내를 내보이신다.
지금은 기초연금과 얼마 안 되는 국민연금을 받아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신다. 지병이 있어 60대 이후로는 육체적인 노동을 하기 어려워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에도 부족한 연금액이라 노인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여의치가 않다.
아들딸의 생활도 넉넉하지 않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단다. 생활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보니 비용이 들어가는 취미생활 같은 것은 꿈도 못 꾼다. 기껏해야 동네 주변을 맴돌거나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생활의 연속이다. 평상시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 혼자서 적적하게 보낸다니, 생계의 어려움에다 마음마저 쓸쓸해 보여 안타까울 따름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노년이 아름답고 행복했으면
위에서 말한 이웃 형님이나 친척 형님은 흔히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에 태어난 세대)의 맏형들로 농촌 출신이다. 나도 1963년생 농촌 출신, 베이비붐 세대의 막내로서 나보다 앞서 태어난 형과 누나들의 청소년기 이후 삶을 듣고 보면서 자랐다. 생각해보면 6.25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대부분 가정에서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생계에 급급하던 그때 농촌의 형과 누나들은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진학은 쉽지 않았고 대학 진학은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많은 농촌 출신의 형과 누나들은 어린 나이에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했다. '공돌이', '공순이'이라 불리며 산업 현장에서 저학력의 서러움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본인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그들의 청춘을 바쳤다. 결혼해서는 시골에 있는 가족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아들딸까지 대가족을 책임지는 어깨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는가. 그때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대다수 서민 가정의 형과 누나들의 삶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밑바탕에는 그 당시 형과 누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시간이 지나 이제 그분들이 60~70대 나이가 되었다. 저학력과 저임금의 상황에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음에도, 정작 본인들의 노후는 대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 저학력과 저임금의 여파는 늙어서도 이어져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건강을 위해 쉬고 싶어도 생계 때문에 일해야 하고, 생계를 위해 일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마음마저 쓸쓸해진다.
언제쯤 힘겨운 노년을 끝내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게 일자리이든 건강 복지이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한다. 우리나라 경제의 초석을 놓은 그분들이 시름을 내려놓고 편안한 노후를 맞이하는 그날이 오길 소망한다. 그분들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