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썰]15년이면 옷이 다 삭아부렀지...'청산가리 막걸리' 부녀 석방되던 '그날'
자유인44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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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12:54
"15년이면 옷이 다 삭아부렀지. 신발도 다 삭아있겠지.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으니까…"
지난 4일 오후 3시를 조금 넘긴 시각, 백 모씨 부녀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형집행정지 결정도 함께 나왔습니다. 수감 중인 피고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소식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부녀의 법률대리인 박준영 변호사도, 순천의 가족들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8월 재심 개시를 위한 재판 절차가 마무리된 뒤 애타게 기다려왔던 결정입니다.
딸은 청주교도소에, 아버지는 순천교도소에 있었습니다. 석방 지휘서만 받으면 바로 나오게 됩니다. 가족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15년 만에 세상 밖을 나서는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엔 빠듯한 시간이었습니다. 딸 백씨의 오빠와 이모는 순천으로, 큰 언니 부부는 청주로 급히 향했습니다.
저녁 7시쯤, 검찰의 석방지휘서가 두 교도소에 각각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부녀는 바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예상 밖이었지만 간단했습니다. 입고 나올 옷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5년이란, 옷감과 신발의 고무가 삭아 문드러질 만큼 긴 시간이었습니다.
딸 백씨의 언니는 회색 겨울 후드티와 카키색 면바지, 하얀 운동화를 사왔습니다. 가격표도 떼지 못했지만 한시가 급했습니다. 언니는 교도관을 통해 옷과 신발 넣어주면서도 계속 걱정했습니다.
"신발이 맞을랑가 모르겠네. 00이(백씨 딸) 발 사이즈가 몇이었더라…"
〈사진=JTBC〉 45분쯤 지나 교도소 문밖으로 나온 딸 백씨,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예상보다 덤덤한 모습이었습니다. 꽃다발을 받아들고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소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엔 "제일 열심히 해주신 변호사한테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또 "잠을 충분히 자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언니와 포옹하는 순간, 결국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같은 시각, 아버지 백씨도 순천교도소에서 석방됐습니다. 15년 동안 쌓인 짐이 백씨보다 먼저 나왔습니다. 교도관 두 명이 나눠들어야 할 만큼 많았습니다. 하얗게 센 머리, 곧 터질만큼 꾹꾹 눌러담은 짐가방 6개가 지난 세월을 보여줬습니다.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 백씨는 "마음이 무겁다"는 짧은 말을 남겼습니다. 차에 타자마자 청주에 있는 박 변호사에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습니다. 박 변호사가 "건강은 어떠시냐" 묻자 "이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부녀는 일단 순천의 가족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백씨 부녀가 살던 집은 이미 경매로 넘어간 지 오래였습니다. 이튿날엔 곧바로 부녀의 아내이고 엄마인, 이 사건 피해자의 묘를 찾았다고 합니다.
법원이 재심을 결정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당시 수사기관의 '직권남용' 범죄 행위가 있었고, ②피고인들의 무죄를 입증하는데 유리한 증거가 제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백씨 부녀의 검찰 조사 영상을 중요한 증거로 들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검찰과 수사관의 끊임없는 유도신문, 회유 등 위법한 수사권의 남용이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관련 기사: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 재심 석방…위법 수사 단서된 '자백 영상' 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73992?ntype=RANKING&type=journalists)
2009년 당시 검찰은 이렇게 얻어낸 자백을 거의 유일한 증거로 내세워 백씨 부녀에 살인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부족한 범행 동기는 "부녀가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가지는 사이였다"는 또 다른 진술을 받아내 채웠습니다.
재심 개시를 위한 재판 과정에선 진술 영상이 재생됐습니다. 박 변호사는 과거 법원에 제출됐던 진술조서와 실제 조사 영상 사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지속적으로 강조했습니다. 모든 자백 영상에 일일이 자막을 달고, 해당 부분이 언급된 조서와 전부 비교 분석해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2009년 8월 26일 정 모 수사관이 딸 백씨를 조사한 영상과 조서 비교 자료 중 일부 대목. 사진=박준영 변호사 제공〉
검찰은 단순히 "예"라고 답한 내용도 부녀의 적극 진술로 뒤바꿔 조서에 기재했습니다. 박 변호사는 이를 수사기관이 허위공문서를 작성한 범죄 행위로 보고, 재심 이유로 들었습니다. 박 변호사는 "재심 결정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법원이 별도의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재심 과정에서 더 적극적으로 밝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상 속에서 부녀를 끊임없이 다그치는 순천지청의 강 모 검사, 당시 미제 사건을 연이어 해결하며 '스타검사'로 불렸습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광주고검으로 인사 발령을 받았고, 항소심에 직접 참여하며 결국 유죄 판단을 받아냈습니다. 당시 아버지 백씨에겐 무기징역이, 딸 백씨에는 징역 20년이 각각 선고됐습니다.
〈사진=관보 캡쳐〉
'스타검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2012년 겨울 강 모 검사가 사건 관계인으로부터 부적절한 접대를 받고 모텔을 드나드는 모습이 보도됐습니다. 2013년엔 이 일로 검사 옷을 벗었습니다. 변호사가 된 뒤에는 "검사장님이 선물을 주기로 했다"며 의뢰인에게 수사 무마를 암시하고 돈을 뜯어내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변호사 자격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영상 속에는 정 모 수사관도 등장합니다. 2009년 당시 검찰총장 표창을 받았고, 2010년엔 국무총리 표창을 받고 퇴임했습니다. 취재진은 정 씨 측에 이번 재심 소식을 알리고 입장을 물었지만,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론 브리핑에 직접 나섰던 김회재 당시 순천지청 차장검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입니다. 재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재심 결정 뒤 최근 언론 간담회에서 "검찰은 당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위법 수사 정황이 확인됐지만 이들이 직접 법원의 심판을 받을 길은 없습니다.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입니다. 직권남용' 범죄의 공소시효는 7년입니다.
〈관련기사 =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담당자 추적…표창받거나 의원 되기도 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74302?type=journalists〉
〈사진=JTBC〉
박 변호사도 처음엔 수사기관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습니다. 지난해 여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사람이 사람한테 이럴 수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1년 반 만에 재심 개시를 위한 재판 절차가 마무리된 뒤,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또 반년이 지났습니다. 박 변호사는 그 시간 동안 조사 영상과 기록을 또다시 들여다봤습니다. 그리고 재심 개시 결정이 난 날, 이렇게 다시 말했습니다.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닌 모두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찰 수사, 허술한 재판은 물론이고 당시 변호인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좀 불편하겠지만 문제제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건을 받고 한동안 방치해둔 저도 잘못이 있습니다. 한 사건이 가지는 무게감을, 우리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자는 이야기를 이 사건을 통해서 해보려고 합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홍준호 당시 재판장(현 변호사)도 JTBC와 서면 인터뷰에서 "흉악범을 찾아 응분의 벌을 가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수사기관이 자신들이 조사하고 있는 피의자가 혹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씩은 재점검해보면 좋겠다"는 입장을 남겼습니다.
검찰은 이번 광주고법의 재심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검찰이 재항고를 하게 되면 대법원의 판단을 다시 기다려야 합니다. 재심 개시 결정이 곧 '무죄'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말 그대로 '재판을 다시 해보겠다'는 뜻입니다. 부녀가 아내와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의혹을 벗고, 15년의 세월을 보상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절차가 남아있을지 아직 구체적으로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조사를 받던 26살 딸은 마흔이 넘었습니다. 아버지는 일흔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 됐습니다. 삭아버린 옷과 신발, 꾹꾹 눌러담은 짐가방이 다 보여주지 못하는 지난 시간의 무게를 생각하면 아득해집니다.
검찰이 오는 11일(목) 까지 재항고하지 않으면, 재심 결정이 확정됩니다. 부녀의 삶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딸 백씨가 석방 뒤 남겼던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도, 많은, 희망은 그냥..안고 있었어요"
"신발이 맞을랑가 모르겄네"…결국 터져버린 눈물
소식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부녀의 법률대리인 박준영 변호사도, 순천의 가족들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8월 재심 개시를 위한 재판 절차가 마무리된 뒤 애타게 기다려왔던 결정입니다.
딸은 청주교도소에, 아버지는 순천교도소에 있었습니다. 석방 지휘서만 받으면 바로 나오게 됩니다. 가족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15년 만에 세상 밖을 나서는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엔 빠듯한 시간이었습니다. 딸 백씨의 오빠와 이모는 순천으로, 큰 언니 부부는 청주로 급히 향했습니다.
저녁 7시쯤, 검찰의 석방지휘서가 두 교도소에 각각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부녀는 바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예상 밖이었지만 간단했습니다. 입고 나올 옷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5년이란, 옷감과 신발의 고무가 삭아 문드러질 만큼 긴 시간이었습니다.
딸 백씨의 언니는 회색 겨울 후드티와 카키색 면바지, 하얀 운동화를 사왔습니다. 가격표도 떼지 못했지만 한시가 급했습니다. 언니는 교도관을 통해 옷과 신발 넣어주면서도 계속 걱정했습니다.
"신발이 맞을랑가 모르겠네. 00이(백씨 딸) 발 사이즈가 몇이었더라…"
같은 시각, 아버지 백씨도 순천교도소에서 석방됐습니다. 15년 동안 쌓인 짐이 백씨보다 먼저 나왔습니다. 교도관 두 명이 나눠들어야 할 만큼 많았습니다. 하얗게 센 머리, 곧 터질만큼 꾹꾹 눌러담은 짐가방 6개가 지난 세월을 보여줬습니다.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 백씨는 "마음이 무겁다"는 짧은 말을 남겼습니다. 차에 타자마자 청주에 있는 박 변호사에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습니다. 박 변호사가 "건강은 어떠시냐" 묻자 "이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부녀는 일단 순천의 가족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백씨 부녀가 살던 집은 이미 경매로 넘어간 지 오래였습니다. 이튿날엔 곧바로 부녀의 아내이고 엄마인, 이 사건 피해자의 묘를 찾았다고 합니다.
위법 수사 단서된 '자백 영상'...조서와 맞춰보니
법원은 백씨 부녀의 검찰 조사 영상을 중요한 증거로 들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검찰과 수사관의 끊임없는 유도신문, 회유 등 위법한 수사권의 남용이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관련 기사: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 재심 석방…위법 수사 단서된 '자백 영상' 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73992?ntype=RANKING&type=journalists)
2009년 당시 검찰은 이렇게 얻어낸 자백을 거의 유일한 증거로 내세워 백씨 부녀에 살인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부족한 범행 동기는 "부녀가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가지는 사이였다"는 또 다른 진술을 받아내 채웠습니다.
재심 개시를 위한 재판 과정에선 진술 영상이 재생됐습니다. 박 변호사는 과거 법원에 제출됐던 진술조서와 실제 조사 영상 사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지속적으로 강조했습니다. 모든 자백 영상에 일일이 자막을 달고, 해당 부분이 언급된 조서와 전부 비교 분석해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검찰은 단순히 "예"라고 답한 내용도 부녀의 적극 진술로 뒤바꿔 조서에 기재했습니다. 박 변호사는 이를 수사기관이 허위공문서를 작성한 범죄 행위로 보고, 재심 이유로 들었습니다. 박 변호사는 "재심 결정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법원이 별도의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재심 과정에서 더 적극적으로 밝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타 검사'는 지금 어디에..그때 그 사람들
'스타검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2012년 겨울 강 모 검사가 사건 관계인으로부터 부적절한 접대를 받고 모텔을 드나드는 모습이 보도됐습니다. 2013년엔 이 일로 검사 옷을 벗었습니다. 변호사가 된 뒤에는 "검사장님이 선물을 주기로 했다"며 의뢰인에게 수사 무마를 암시하고 돈을 뜯어내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변호사 자격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영상 속에는 정 모 수사관도 등장합니다. 2009년 당시 검찰총장 표창을 받았고, 2010년엔 국무총리 표창을 받고 퇴임했습니다. 취재진은 정 씨 측에 이번 재심 소식을 알리고 입장을 물었지만,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론 브리핑에 직접 나섰던 김회재 당시 순천지청 차장검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입니다. 재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재심 결정 뒤 최근 언론 간담회에서 "검찰은 당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위법 수사 정황이 확인됐지만 이들이 직접 법원의 심판을 받을 길은 없습니다.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입니다. 직권남용' 범죄의 공소시효는 7년입니다.
〈관련기사 =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담당자 추적…표창받거나 의원 되기도 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74302?type=journalists〉
박준영 변호사 "저를 포함한, 사람들 모두의 잘못이에요"
박 변호사도 처음엔 수사기관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습니다. 지난해 여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사람이 사람한테 이럴 수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1년 반 만에 재심 개시를 위한 재판 절차가 마무리된 뒤,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또 반년이 지났습니다. 박 변호사는 그 시간 동안 조사 영상과 기록을 또다시 들여다봤습니다. 그리고 재심 개시 결정이 난 날, 이렇게 다시 말했습니다.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닌 모두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찰 수사, 허술한 재판은 물론이고 당시 변호인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좀 불편하겠지만 문제제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건을 받고 한동안 방치해둔 저도 잘못이 있습니다. 한 사건이 가지는 무게감을, 우리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자는 이야기를 이 사건을 통해서 해보려고 합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홍준호 당시 재판장(현 변호사)도 JTBC와 서면 인터뷰에서 "흉악범을 찾아 응분의 벌을 가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수사기관이 자신들이 조사하고 있는 피의자가 혹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씩은 재점검해보면 좋겠다"는 입장을 남겼습니다.
'재심 결정', 끝 아닌 새로운 시작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조사를 받던 26살 딸은 마흔이 넘었습니다. 아버지는 일흔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 됐습니다. 삭아버린 옷과 신발, 꾹꾹 눌러담은 짐가방이 다 보여주지 못하는 지난 시간의 무게를 생각하면 아득해집니다.
검찰이 오는 11일(목) 까지 재항고하지 않으면, 재심 결정이 확정됩니다. 부녀의 삶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딸 백씨가 석방 뒤 남겼던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도, 많은, 희망은 그냥..안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