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어른의 말을 배우고 싶다
자유인75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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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15:24
삐삐언니의 마음책방 듣기 좋은 말 하기 싫은 말
햇수로 치니 벌써 2년 전입니다. 늦가을 허망하게 떠나간 죽음들로 혼란과 슬픔이 뒤섞인 시간을 꾸역꾸역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사무실 책상에 선물이 올려져 있었어요. ‘임진아의 2023 오늘을 채우는 일력’.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 작가인 임진아가 하루하루의 느낌을 ‘‘임진아 본인과 반려견 치치’ 캐릭터에 담은 거였습니다. 매일 새로운 단어 하나씩 놓고 그에 대한 감흥을 적은 문장이 적혀 있었고요.
그래요, 이 일력 덕분에 2023년이 무사했어요. 피곤에 절어 집에 돌아온 날 일력을 한장 넘기면, 오늘도 뭐 괜찮았네, 빙긋 ‘30초 마법’에 걸렸습니다. 2024년을 앞두고 다시 임진아 일력을 구하기 위해 매일 온라인서점을 드나들었지만 감감 무소식. 애 태우다 출판사에 연락해 올해는 만들지 않는다는 답변을 듣고나서야 단념했지요.
요일을 상관하지 않는다면 2024년에도 다시 한번 사용하지 뭐. 이렇게 맘 먹고 났는데, 임진아의 새로운 에세이집 발간 소식을 듣게 됐어요.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한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듣기 좋은 말 하기 싫은 말’.
더 나은 어른이라…. 나는 서른세살 쯤부터 ‘서른살 넘으면 부모 탓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서른 무렵 엄마아빠 원망을 한바탕 하고 난 뒤였지요. 책상에 금 긋듯, 인생에 애-어른을 나누는 금을 딱 그어놓는다면 그게 서른살일 것 같았습니다. 서른이 되면 당연히 스스로 앞가림을 해야 하고, 과정뿐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한다고 생각한 거에요.
하지만 삼십세를 넘은 지 십여년이 훌쩍 지나고 보니, ‘30살부터 어른’이라는 기준 역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변을 둘러보면 앞가림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해도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일, 정말 쉽지 않잖아요. 어른이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의 긴장, 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답답한 마음. 요즘 자주 듣고 있는 잔나비와 황푸하의 노래에도 이런 대목이 나와요.
“꼭 다문 입 그 새로 삐져나온 보잘것 없는 나의 한숨에 나 들으라고 내쉰 숨이더냐 아버지 내게 물으시고 제발 저려 난 답할 수 없었네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갈 거야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잔나비 ‘꿈과 책과 힘과 벽’).
어디까지 추락할지 몰라 아예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기도 합니다. “난 아인슈페너 부드러운 크림 그 밑에는 언제나 씁쓸한 인생 오늘도 난 아인슈페너 젓지 말아 줘요 아직까지 바닥은 모르고 싶어 내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상상은 했지만 벌써 커피 한 잔쯤은 쉽게 비우게 되었어”(황푸하 ‘아인슈페너’)
‘듣기 좋은 말 하기 싫은 말’을 읽어보니까, 임진아 역시 ‘앞가림 하는 어른’으로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시절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학원을 다닐 수 없었고, 스무살이 넘어선 카페 아르바이트, 굿즈 디자이너 등으로 일하며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생계를 꾸려갔대요.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 시절 회사 동료로부터 “진아는 그때 참 대단했어”라는 말을 듣곤, 엉엉 울며 집으로 왔다고. 이제 임진아는 사고 싶은 책은 돈 걱정 없이 다 살 수 있고, 내고 싶은 책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하지만 어른의 세계는 넓고 넓어서, 더 나은 어른이 되는 것은 또다른 차원 아닐까요. 임진아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오히려 나이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을 신경쓰기 시작하면서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좋은 어른은 좋은 내가 되었을 때 반짝일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잃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말을 고르지 않고, 좋은 어른으로 보이려고 애써 당당한 표정을 짓지 않고, 계속해서 나와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낼 때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임진아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던 지난 어느 봄날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고 해요. “한손엔 맥주, 한손엔 만화책. 어른이 되자. 나랑 살자.”
나는 어떤가. 나도 나답게 살고 싶어요. 업무-휴식, 남과 함께하는 시간-나 혼자 있는 시간 사이 균형을 맞추려고 애씁니다. 임진아 말대로 “어느 나이에 서 있더라도 금방 뛰어나가 놀 것 같은 기운”을 갖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나 요즘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후배한테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침을 꼴깍 삼키고 좀 참았어요. 조언 같은 거 하지 말고 지켜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알면서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 그때 알았습니다. 내가 어른의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걸. 임진아도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저마다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말만 내뱉지 않아도 우리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
이주현 기자 [email protected]
삐삐언니의 마음책방은?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새로 알게 된 것보다 잊어버리는 게 더 많기 때문에 지식 총량이 늘어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이해력이 좋아지는 건 분명합니다. 나를 위로하고 타인을 격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요. 좀더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은 삐삐언니가 책을 통해 마음 근육을 키우는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햇수로 치니 벌써 2년 전입니다. 늦가을 허망하게 떠나간 죽음들로 혼란과 슬픔이 뒤섞인 시간을 꾸역꾸역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사무실 책상에 선물이 올려져 있었어요. ‘임진아의 2023 오늘을 채우는 일력’.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 작가인 임진아가 하루하루의 느낌을 ‘‘임진아 본인과 반려견 치치’ 캐릭터에 담은 거였습니다. 매일 새로운 단어 하나씩 놓고 그에 대한 감흥을 적은 문장이 적혀 있었고요.
그래요, 이 일력 덕분에 2023년이 무사했어요. 피곤에 절어 집에 돌아온 날 일력을 한장 넘기면, 오늘도 뭐 괜찮았네, 빙긋 ‘30초 마법’에 걸렸습니다. 2024년을 앞두고 다시 임진아 일력을 구하기 위해 매일 온라인서점을 드나들었지만 감감 무소식. 애 태우다 출판사에 연락해 올해는 만들지 않는다는 답변을 듣고나서야 단념했지요.
요일을 상관하지 않는다면 2024년에도 다시 한번 사용하지 뭐. 이렇게 맘 먹고 났는데, 임진아의 새로운 에세이집 발간 소식을 듣게 됐어요.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한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듣기 좋은 말 하기 싫은 말’.
더 나은 어른이라…. 나는 서른세살 쯤부터 ‘서른살 넘으면 부모 탓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서른 무렵 엄마아빠 원망을 한바탕 하고 난 뒤였지요. 책상에 금 긋듯, 인생에 애-어른을 나누는 금을 딱 그어놓는다면 그게 서른살일 것 같았습니다. 서른이 되면 당연히 스스로 앞가림을 해야 하고, 과정뿐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한다고 생각한 거에요.
하지만 삼십세를 넘은 지 십여년이 훌쩍 지나고 보니, ‘30살부터 어른’이라는 기준 역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변을 둘러보면 앞가림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해도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일, 정말 쉽지 않잖아요. 어른이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의 긴장, 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답답한 마음. 요즘 자주 듣고 있는 잔나비와 황푸하의 노래에도 이런 대목이 나와요.
“꼭 다문 입 그 새로 삐져나온 보잘것 없는 나의 한숨에 나 들으라고 내쉰 숨이더냐 아버지 내게 물으시고 제발 저려 난 답할 수 없었네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갈 거야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잔나비 ‘꿈과 책과 힘과 벽’).
어디까지 추락할지 몰라 아예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기도 합니다. “난 아인슈페너 부드러운 크림 그 밑에는 언제나 씁쓸한 인생 오늘도 난 아인슈페너 젓지 말아 줘요 아직까지 바닥은 모르고 싶어 내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상상은 했지만 벌써 커피 한 잔쯤은 쉽게 비우게 되었어”(황푸하 ‘아인슈페너’)
‘듣기 좋은 말 하기 싫은 말’을 읽어보니까, 임진아 역시 ‘앞가림 하는 어른’으로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시절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학원을 다닐 수 없었고, 스무살이 넘어선 카페 아르바이트, 굿즈 디자이너 등으로 일하며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생계를 꾸려갔대요.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 시절 회사 동료로부터 “진아는 그때 참 대단했어”라는 말을 듣곤, 엉엉 울며 집으로 왔다고. 이제 임진아는 사고 싶은 책은 돈 걱정 없이 다 살 수 있고, 내고 싶은 책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하지만 어른의 세계는 넓고 넓어서, 더 나은 어른이 되는 것은 또다른 차원 아닐까요. 임진아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오히려 나이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을 신경쓰기 시작하면서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좋은 어른은 좋은 내가 되었을 때 반짝일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잃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말을 고르지 않고, 좋은 어른으로 보이려고 애써 당당한 표정을 짓지 않고, 계속해서 나와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낼 때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임진아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던 지난 어느 봄날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고 해요. “한손엔 맥주, 한손엔 만화책. 어른이 되자. 나랑 살자.”
나는 어떤가. 나도 나답게 살고 싶어요. 업무-휴식, 남과 함께하는 시간-나 혼자 있는 시간 사이 균형을 맞추려고 애씁니다. 임진아 말대로 “어느 나이에 서 있더라도 금방 뛰어나가 놀 것 같은 기운”을 갖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나 요즘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후배한테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침을 꼴깍 삼키고 좀 참았어요. 조언 같은 거 하지 말고 지켜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알면서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 그때 알았습니다. 내가 어른의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걸. 임진아도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저마다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말만 내뱉지 않아도 우리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
이주현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