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일주문은 하체 근육만 단련한 캐릭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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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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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6 16:57
[대한민국 문화유산 탐방기] 충남 예산 수덕사 대웅전
3년의 기다림
예산의 수덕사를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2021년이었다. 특히 대웅전을 직접 보고 싶었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에 대해 공부하며 수덕사 대웅전의 우아하고 견고한 구조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수덕사는 백제 시절에 창건됐다고 하니 1400년이 넘는 세월을 품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수덕사를 향한 기대감을 가득 안고 빌려 온 경차에 몸을 싣는다. 풍절음과 엔진 소리를 배경 삼아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2시간을 달린다. 해미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쌓인 눈을 보며 덕산면의 밭과 산 사이로 20분 정도 더 달린다. 이 길 끝에서 수덕사가 조용하게 나를 반길 것이다.
수덕사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수덕사 경내로 향하는 길을 확인한다. 지체할 것 없이 몸을 틀어 경내 쪽으로 움직인다. 대부분의 큰 사찰처럼, 수덕사 역시 경내로 진입하기 전에 상점가를 지나야 한다. 호객 행위가 싫어 얼른 지나려는데, 갑자기 한 상인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뻥튀기 샘플을 건넨다.
상인의 환한 웃음은 호객 행위보다는 따뜻한 환대처럼 느껴진다. 얼떨결에 뻥튀기를 받아 든다. 하나 사볼까 했지만, 누가 먹겠나. 하는 생각에 카드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뻥튀기를 입에 물고 기분 좋게 상점가를 빠져 나간다.
우측으로 휘어진 길을 따라 돌아 가보니 시야에 장엄한 문이 가득 찬다. 배가 불룩한 배흘림기둥 4개가 나란히 서서 머리 위의 지붕을 튼실하게 받치고 있다. 일주문의 모습이 마치 하체 근육만 단련한 캐릭터 같다.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난다. 일주문 편액에는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라고 적혀 있다. 왠지 '덕' 자와 '숭' 자가 익숙한 그 단어일 것 같다. 덕을 숭상한다는 의미일까. 검색해보니 정말 '德(덕 덕)' 자에, '崇(존중하다 숭) 자'다.
30분 정도 걸었을 무렵. 황하정루('루'는 2층 이상 건물을 말한다. 아래가 뚫려있다)의 1층을 지난다. 열댓 개의 계단을 밟고 오르자, 기대했던 법당 대신 거대한 성벽이 나를 맞이한다. 5m 이상은 돼 보이는 돌벽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루를 통과하면 바로 법당을 볼 수 있다. 서울 봉은사나 강화 전등사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수덕사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돌벽이 나타났다. 틈 없이 맞춰진 돌들은 아마도 산의 경사를 보완하기 위해 쌓은 듯하다.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정교하게 다듬어진 계단을 오른다.
낭중지추의 대웅전
드디어 수덕사의 심장부인 대웅전 권역이다. 멀리 보이는 대웅전은 기대했던 대로 소박하고 담백하다. 화려한 사찰 단청 대신, 쌀뜨물을 연상시키는 뽀얀 나무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의도된 디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람과 비에 단청이 조금씩 벗겨지고, 단청을 새로 칠하지 않으면서 대웅전은 서서히 시간을 담은 모습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과 자연의 영향이 어우러져 오히려 역사와 전통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해준다.
눈이 녹아 질퍽한 마당을 지나 대웅전에 다가간다. 대웅전 앞 10개 남짓 되는 계단 위에서 두 명의 중년 남성이 휴대전화에 눈을 고정한 채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심코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인다. "이 건물이 1308년에 지어졌다고? 그걸 어떻게 알았대?" 한 명이 놀라워한다. "일제강점기에 수리하면서 기록이 발견됐다네?" 두 명의 학구적인 대화가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같아 귀여워 보인다.
두 남자의 대화에 이어서 설명 해보자면, 일제강점기 대웅전 수리 과정(1937년)에서 먹으로 남긴 기록을 발견된 덕에 이 건물의 정확한 건조 연대를 알 수 있었다.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이 재위하던 1308년에 기원을 두고 있음이 맞았다. 수덕사 대웅전처럼 명확한 건축 시기를 지닌 목조 고(古)건축물은 드문 사례이며, 연대를 알 수 있는 우리나라 건조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수덕사의 대웅전은 정면은 세 칸, 측면은 네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칸 수만 볼 때는 앞뒤로 더 긴 형태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좌우가 더 길다. 기둥 사이 넓이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대웅전을 자세히 관찰할수록, 그 간결함에서 오는 매력이 점점 명확해진다.
간소하면서도 허전함이 없고, 단순함 속에서 재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다듬은 일꾼의 노력이 엿보인다. 규모도 더 크고, 단청도 화려한 주변 건물에 대웅전의 존재감이 가려질 법도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대웅전은 일곱 줄의 석축 위에 올려져 있어 주변의 청련당이나 템플스테이 건물보다 더욱 돋보이고, 대웅전이 가진 균형미 덕에 그 자체로 이미 주인공이다.
법당에 앉아
법당 문 앞에 신발을 벗고 가지런히 정리한다. 손에 쥐고 있던 빈 커피 컵은 발판 옆에 내려둔다.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석가모니와 눈을 마주쳤다.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를 올린다.
안에서는 불자 두 분이 진지하게 불경을 읊조리고 있다. 살금살금. 나무 바닥이 삐걱거려 소리가 나지 않도록 걸음을 옮긴다. 회색 방석 하나를 집고 내 몸만큼이나 굵은 기둥 옆에 자리를 잡는다.
누가 고건축 애호가 아니랄까 봐, 내부 양식부터 뜯어보기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니, 보와 도리 그리고 서까래에 남아있는 단청의 흔적이 분명히 보인다.
자연광으로만 대웅전 내부를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문양까지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과거 화려한 단청의 존재했음은 분명했다. 저 흐릿한 단청은 언제 마지막으로 칠한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궁금증에 사로잡힌다.
건물의 천장부터 시작해 벽면까지 둘러보던 나의 시선은 이제 황금빛 불상에 이르러 멈춘다. 부처님에게 화두를 던질 시간이다. 언제나 그렇듯 부처님이 대답을 주시지는 않겠지만. 마음 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고요가 찾아온다. 부처님과 마주하고 그저 혼자서 떠드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생긴다.
하지만 부처님의 침묵은 어느 순간 경청이 아닌, 이제 그만 돌아 가라는 신호로 다가온다. 대웅전을 나오기 전, 자리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계속되는 절. 무릎이 뻐근하다. 다음에는 열 번만 하자.
좋은 건 함께
어설픈 관조를 끝내며 만족감을 안고 조용히 자리를 뜬다. 번잡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이렇게 수덕사에 들렀던 것이 얼마나 훌륭한 결정이었는지 새삼 느끼며, 스스로에게 작은 칭찬을 건넨다.
잠깐의 틈을 내 수덕사 대웅전을 찾아간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대웅전이 가진 담백한 매력은 3년의 기다림을 아깝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이 아름다움을 나 혼자만 즐길 수 없다. 조각공원처럼 조성된 수덕사의 넓은 진입로를 되돌아 나가는 길에 흥겨운 마음으로 전화를 건다.
"엄마, 수덕사 정말 좋다. 다음에 같이 오자."
▲ 수덕사 대웅전(국보, 1308년 건조)과 수덕사 삼층석탑(충남 유형문화재 고려시대 제작) |
ⓒ 박배민 |
수덕사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本寺))
주소: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 (041-330-7700)
소장 문화재: 대웅전(국보),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노사나불 괘불탱(보물), 삼층석탑(충남 유형문화재) 등 8건
3년의 기다림
예산의 수덕사를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2021년이었다. 특히 대웅전을 직접 보고 싶었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에 대해 공부하며 수덕사 대웅전의 우아하고 견고한 구조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수덕사는 백제 시절에 창건됐다고 하니 1400년이 넘는 세월을 품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수덕사를 향한 기대감을 가득 안고 빌려 온 경차에 몸을 싣는다. 풍절음과 엔진 소리를 배경 삼아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2시간을 달린다. 해미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쌓인 눈을 보며 덕산면의 밭과 산 사이로 20분 정도 더 달린다. 이 길 끝에서 수덕사가 조용하게 나를 반길 것이다.
수덕사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수덕사 경내로 향하는 길을 확인한다. 지체할 것 없이 몸을 틀어 경내 쪽으로 움직인다. 대부분의 큰 사찰처럼, 수덕사 역시 경내로 진입하기 전에 상점가를 지나야 한다. 호객 행위가 싫어 얼른 지나려는데, 갑자기 한 상인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뻥튀기 샘플을 건넨다.
상인의 환한 웃음은 호객 행위보다는 따뜻한 환대처럼 느껴진다. 얼떨결에 뻥튀기를 받아 든다. 하나 사볼까 했지만, 누가 먹겠나. 하는 생각에 카드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뻥튀기를 입에 물고 기분 좋게 상점가를 빠져 나간다.
▲ 환영의 뻥튀기 |
ⓒ 박배민 |
우측으로 휘어진 길을 따라 돌아 가보니 시야에 장엄한 문이 가득 찬다. 배가 불룩한 배흘림기둥 4개가 나란히 서서 머리 위의 지붕을 튼실하게 받치고 있다. 일주문의 모습이 마치 하체 근육만 단련한 캐릭터 같다.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난다. 일주문 편액에는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라고 적혀 있다. 왠지 '덕' 자와 '숭' 자가 익숙한 그 단어일 것 같다. 덕을 숭상한다는 의미일까. 검색해보니 정말 '德(덕 덕)' 자에, '崇(존중하다 숭) 자'다.
▲ ▲ 수덕사 일주문 |
ⓒ 박배민 |
30분 정도 걸었을 무렵. 황하정루('루'는 2층 이상 건물을 말한다. 아래가 뚫려있다)의 1층을 지난다. 열댓 개의 계단을 밟고 오르자, 기대했던 법당 대신 거대한 성벽이 나를 맞이한다. 5m 이상은 돼 보이는 돌벽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루를 통과하면 바로 법당을 볼 수 있다. 서울 봉은사나 강화 전등사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수덕사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돌벽이 나타났다. 틈 없이 맞춰진 돌들은 아마도 산의 경사를 보완하기 위해 쌓은 듯하다.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정교하게 다듬어진 계단을 오른다.
▲ 돌벽 위에서 찍은 황하정루의 뒷편 |
ⓒ 박배민 |
낭중지추의 대웅전
드디어 수덕사의 심장부인 대웅전 권역이다. 멀리 보이는 대웅전은 기대했던 대로 소박하고 담백하다. 화려한 사찰 단청 대신, 쌀뜨물을 연상시키는 뽀얀 나무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의도된 디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람과 비에 단청이 조금씩 벗겨지고, 단청을 새로 칠하지 않으면서 대웅전은 서서히 시간을 담은 모습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과 자연의 영향이 어우러져 오히려 역사와 전통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해준다.
▲ (사진 기준) 템플 스테이(왼쪽), 수덕사 대웅전(중앙), 청련당(오른쪽) |
ⓒ 박배민 |
눈이 녹아 질퍽한 마당을 지나 대웅전에 다가간다. 대웅전 앞 10개 남짓 되는 계단 위에서 두 명의 중년 남성이 휴대전화에 눈을 고정한 채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심코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인다. "이 건물이 1308년에 지어졌다고? 그걸 어떻게 알았대?" 한 명이 놀라워한다. "일제강점기에 수리하면서 기록이 발견됐다네?" 두 명의 학구적인 대화가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같아 귀여워 보인다.
두 남자의 대화에 이어서 설명 해보자면, 일제강점기 대웅전 수리 과정(1937년)에서 먹으로 남긴 기록을 발견된 덕에 이 건물의 정확한 건조 연대를 알 수 있었다.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이 재위하던 1308년에 기원을 두고 있음이 맞았다. 수덕사 대웅전처럼 명확한 건축 시기를 지닌 목조 고(古)건축물은 드문 사례이며, 연대를 알 수 있는 우리나라 건조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 수덕사 대웅전 앞 마당. 고려시대 제작한 3층 석탑이 놓여있다. |
ⓒ 박배민 |
수덕사의 대웅전은 정면은 세 칸, 측면은 네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칸 수만 볼 때는 앞뒤로 더 긴 형태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좌우가 더 길다. 기둥 사이 넓이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대웅전을 자세히 관찰할수록, 그 간결함에서 오는 매력이 점점 명확해진다.
간소하면서도 허전함이 없고, 단순함 속에서 재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다듬은 일꾼의 노력이 엿보인다. 규모도 더 크고, 단청도 화려한 주변 건물에 대웅전의 존재감이 가려질 법도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대웅전은 일곱 줄의 석축 위에 올려져 있어 주변의 청련당이나 템플스테이 건물보다 더욱 돋보이고, 대웅전이 가진 균형미 덕에 그 자체로 이미 주인공이다.
▲ 수덕사 대웅전 측면. |
ⓒ 박배민 |
법당에 앉아
법당 문 앞에 신발을 벗고 가지런히 정리한다. 손에 쥐고 있던 빈 커피 컵은 발판 옆에 내려둔다.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석가모니와 눈을 마주쳤다.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를 올린다.
안에서는 불자 두 분이 진지하게 불경을 읊조리고 있다. 살금살금. 나무 바닥이 삐걱거려 소리가 나지 않도록 걸음을 옮긴다. 회색 방석 하나를 집고 내 몸만큼이나 굵은 기둥 옆에 자리를 잡는다.
▲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조선 인조 17년(1639) 제작. |
ⓒ 박배민 |
누가 고건축 애호가 아니랄까 봐, 내부 양식부터 뜯어보기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니, 보와 도리 그리고 서까래에 남아있는 단청의 흔적이 분명히 보인다.
자연광으로만 대웅전 내부를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문양까지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과거 화려한 단청의 존재했음은 분명했다. 저 흐릿한 단청은 언제 마지막으로 칠한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궁금증에 사로잡힌다.
▲ 수덕사 대웅전 내부의 천장. |
ⓒ 박배민 |
건물의 천장부터 시작해 벽면까지 둘러보던 나의 시선은 이제 황금빛 불상에 이르러 멈춘다. 부처님에게 화두를 던질 시간이다. 언제나 그렇듯 부처님이 대답을 주시지는 않겠지만. 마음 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고요가 찾아온다. 부처님과 마주하고 그저 혼자서 떠드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생긴다.
하지만 부처님의 침묵은 어느 순간 경청이 아닌, 이제 그만 돌아 가라는 신호로 다가온다. 대웅전을 나오기 전, 자리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계속되는 절. 무릎이 뻐근하다. 다음에는 열 번만 하자.
▲ 수덕사 어간문(가운데 문). 전각 출입은 측면 문으로만 가능하다. |
ⓒ 박배민 |
좋은 건 함께
어설픈 관조를 끝내며 만족감을 안고 조용히 자리를 뜬다. 번잡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이렇게 수덕사에 들렀던 것이 얼마나 훌륭한 결정이었는지 새삼 느끼며, 스스로에게 작은 칭찬을 건넨다.
잠깐의 틈을 내 수덕사 대웅전을 찾아간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대웅전이 가진 담백한 매력은 3년의 기다림을 아깝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이 아름다움을 나 혼자만 즐길 수 없다. 조각공원처럼 조성된 수덕사의 넓은 진입로를 되돌아 나가는 길에 흥겨운 마음으로 전화를 건다.
"엄마, 수덕사 정말 좋다. 다음에 같이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