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예술기행] 아프리카 초원에서 만난 대자연
자유인110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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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 16:31
◆킬리만자로의 표범
'킬리만자로는 6,570m 높이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서쪽 정상은 현지 마사이 말로 '응가에 응가이'로 불리는데, 이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 가까이에는 미라 상태로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높은 곳에서 그 표범이 무얼 찾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 첫 문장이다.
우리는 케냐 나이로비에서 암보셀리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낡은 지프는 덜컹거렸고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 구분 없이 부옇게 먼지 이는 길을 6시간 남짓 달리니 저 멀리 산 정상이 테이블처럼 평평한 킬리만자로가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났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을 우린 이제 곧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헤밍웨이처럼 우리도 실제론 볼 수 없었다.
킬리만자로는 남위 3° 적도, 케냐와의 탄자니아 두 나라 국경에 걸쳐진 동서 약 80㎞에 3개의 주 화산으로 이루어진 화산괴다. 중앙에 위치한 키보 화산(5,895m)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고 만년설로 덮인 정상 분화구엔 수심 300m의 칼데라가 있다. 11㎞ 떨어진 마웬시산은 침식을 많이 받아 들쭉날쭉하며 깎아지른 듯 험준하고, 남쪽 기슭 모시산은 교역 중심지이자 등반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킬리만자로 등반은 하지 않고 암보셀리, 나이바사, 마사이라마 사파리 투어를 하기로 했다. 세렝게티가 우기(雨期)인 탓이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모두 아프리카는 초행이었지만 흑백TV 시절 타잔이 제인을 구하기 위해 치타와 나무줄기를 타며 '아아아~' 외치던 기억을 가진 터라 우리는 홍안의 소년, 소녀들처럼 들떠있었다. 사자, 코끼리, 버팔로, 표범, 코뿔소 그리고 기린, 가젤, 지브라, 하마, 하이에나를 동물원이 아니라 아프리카 초원에서 직접 볼 수 있다니!
◆동물의 왕국,암보셀리
숙소인 올 투카이 롯지(Ol Tukai Lodge)에 들어서며 우리는 웰컴 주스를 들고 웰컴 뮤직에 맞춰 몸을 흔들며 각자 배정된 참한 통나무 방갈로에 즐겁게 짐을 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곧바로 엄청난 사건이 바로 코앞에서 벌어질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야생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전기 철조망이 쳐진 넓은 초원 커다란 식탁에서 늦은 점심 후 사파리를 타기 전 각자 휴식을 취할 때였다.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굉음과 함께 일행들의 비명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후다닥 밖으로 나가보니 전기 철조망 저 켠으로 코끼리 떼가 소리 지르며 달려가고 있고 낯이 하얗게 질린 A부인이 손발을 휘저으며 우리에게 설명한다.
식사 후 풀밭에 누워 남편과 함께 선텐을 하고 있는데 코끼리가 갑자기 달려들더라는 것이다. 물론 철조망 탓에 코끼리가 내부로 들어올 순 없었지만 놀라서 피한 남편이 방갈로로 후다닥 들어가 문을 잠궈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파안대소했고, 여행 내내 그 남편이 부인에게 쩔쩔 맨 건 당연하다.
암보셀리국립공원(Maasai Amboseli Game Reserve)은 킬리만자로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야생동물 수렵금지 구역이다.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킬리만자로의 눈'을 썼다. 사파리를 타고 나가니 호숫가에 홍학이 군무를 추고 있다. 누 떼가 지나가고 귀여운 가젤이 뛰어가다 고개를 휙 돌리고 우리를 쳐다본다. 얼룩무늬가 너무 멋진 지브라를 그윽히 바라보는 하이에나들, 누군가 저기 기린이다, 소리친다.
망원경 속으로 코끼리가 지나가자 암사자가 포식을 한 듯 그 곁에 누워 길게 하품을 한다. 멀리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희끗하고 지팡이를 든 마사이 노인이 한 그루 나무처럼 서서 차 지붕 위에서 함성을 지르는 우리를 바라본다. 사파리에서 유일하게 내려서 온 사방을 볼 수 있는 관측 포인트(Observation Hill)에서는 하늘에 뜬 뭉게구름도 360도 뱅글뱅글 돌면서 우리에게 '잠보(Jambo,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 아무 문제 없어) 아프리카 동부 반투족이 주로 쓰는 스와힐리어다.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잠보'와 함께 가장 많이 쓴 말이기도 하다. 호텔에서 요리사가 계란 프라이를 늦게 줘서 미안하다는 제스츄어를 할 때 하쿠나 마타타 했더니 하얀 이를 활짝 드러내고 웃던 기억이 난다. 하쿠나 마타타, 아프리카를 함께 다녀온 우리는 이후에도 만날 때마다 하쿠나 마타타! 인사한다.
◆보트 사파리를 즐기는 나이바샤
암보셀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이바샤(Naivasha, '호수'라는 의미)로 갔다. 지구의 고랑으로 불리는 광활하고도 장엄한 그레이트 벨리를 지나 도착한 나이바샤는 이름 그대로 보트 사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홍학, 펠리칸, 독수리를 비롯한 수많은 조류를 보며 낡은 보트를 타고 초승달 모양의 크레센트섬으로 갔다. 물속을 노니는 하마와 물소를 특히 조심하라는 당부에 탄성도 지르지 않고 건너간 섬은 황홀 그 자체였다.
섬을 가로질러 걸으며 영양과 기린, 얼룩말들이 풀을 뜯거나 두두두 뛰어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역시 기린의 키높이 이상에만 잎이 달린 나무들과 호수에 반쯤 잠긴 나목들은 자연의 신비를 제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초승달 섬을 나와 해가 뉘엿뉘엿 지는 호수를 다시 건너 선박장에 닿았을 땐 한바탕 꿈을 꾼 듯했다. 며칠 후 귀국해 뉴스로 그 호수를 건너던 중국인들이 참사를 당했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지만.(그때 우리 보트 중 한 대도 모터가 호수 중간에서 꺼져버리는 사고가 있었다!)
나이바샤 소파 롯지(Naivasha Sopa Lodge)는 호사스러움 그 자체였다. 개인 정원이 딸린 넓은 룸 밖으로 하마가 자주 출몰하니 어두워지면 반드시 버틀러의 안내를 받아 바깥 출입을 해야하는 게 좀 불편했지만 품격 있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튿날 아침 마사이라마로 가기 위해 롯지를 나설 때까지 직원들도 친절했다.
◆맨발의 전사들,마사이족
아프리카 최대 동물 서식지로 알려진 마사이라마는 탄자니아의 세렝게티와 맞닿아 있다. 나일악어와 사자들 그리고 버팔로 떼와 타조 등 수많은 초식동물들을 보며 우리는 마사이족 마을로 갔다. 겨울이 되면 땔감으로도 쓴다는 소똥과 짚을 섞어 지은 흙집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늘씬한 키(평균 177㎝)의 마사이족이 뜀뛰기를 하며 우리를 맞는다.
사자들도 무서워한다는 맨발의 전사들이다. 긴 막대기 하나만 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 없지만 표정만은 한없이 느긋하다. 여인들은 아름답고, 노인들은 마치 우듬지만 무성한 한 그루 나무 같다. 다시 한나절 사파리를 한 뒤 숙소로 돌아와 혹시 아프리카에서 음식이 부족할까 걱정한 일행들이 가져온 전투식량 때문에 한바탕 웃으며 그것들을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이튿날 마지막 일정인 열기구를 타고 버팔로, 누, 홍학들이 떼 지어 다니는 초원을 하늘에서 바라보다가 근사하게 차려진 아침을 먹고 나이로비로 가는 경비행기를 타러 평평한 공터로 갔다. 세상에, 그곳에 토산품을 파는 장이 있었다. 먼지가 가득 덮인 조각품과 목걸이, 팔찌 등을 보며 누가 마사이라마 면세점이라 눙친다. 나는 문득 그때 뙤약볕에 앉은 여인에게서 몽땅 사버린 탈색된 기린 조각이 아직 베란다 창고에 들어있다는 걸 깨닫는다. 언제 다시 색을 입혀야 할 텐데.
박미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