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습격해 커피 빼돌린 갱단... 무려 한국에서 일어난 일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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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8 17:08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정부의 수입 금지에도 식지 않은 커피의 인기
1966년 12월 16일, 당시 커피 유행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져 중앙 일간지들이 연일 대서특필하였다. <경향신문> 1966년 12월 16일 자 사회면 기사의 제목은 '달리는 열차에 갱, 범인도주'였고, 함께 실린 사진의 설명문은 '갱단이 열차에서 꺼내 던진 미제 커피 100상자'였다.
이 신문에서 보도한 사건의 전모는 이러했다. 12월 15일 0시 55분쯤 서울발 부산행 제61호 미군 전용 정기 화물열차가 충남 대덕군 회덕리 북쪽 1500미터 지점 언덕바지를 달릴 무렵 갱단이 화물차에 올라타 문을 부순 후 미군 보급품인 커피 1백 상자를 철로 변에 꺼내 던지고, 화차 10량을 분리시켜 털려다 동 화물열차 뒤를 달려오던 목포행 33열차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범인들은 모두 도주하였다.
<동아일보>는 미리 타고 있던 갱들이 10량의 화차를 분리시켜 다량의 군수물자를 훔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보도하였다. 범행 장소에 빼돌린 커피 상자를 옮길 트럭이 대기했던 흔적으로 미루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대규모 갱단의 범행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벌어진 지 8일이 지난 12월 23일 밤 경찰은 해당 열차의 차장 이모씨 등 3명을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하고, 주범 중 1명인 허동순을 체포하여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발표하였다. 또 다른 주범인 김덕문과 그의 처 이외에 모두 검거하였는데 이들은 이미 9월 21일에도 같은 열차에서 같은 수법으로 미제 커피 40상자를 훔쳐낸 것으로 밝혀졌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 <경향신문>은 이 사건을 다시 보도하면서 이 사건에는 미군물자상습절도단이 개입하였고, 경찰이 잡힌 범인을 놓아주었으며, 군 기관원이 이들과 연락이 되어 현장에 나타났고, 철도직원이 가담하여 열차를 정지시켜준 사실을 보도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조선일보>도 12월 27일 자에 '부평 모의에서 회덕 범행까지-열차갱 그 전모, 마치 서부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사건의 모의부터 실행까지를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이들이 사건을 모의한 아지트, 공범을 만난 장소 모두 다방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부평 D다방이 이들의 아지트였다. 추석에 미군열차에서 커피 46상자를 털어먹어 재미를 본 허동순, 김덕문 등이 또 다른 범행을 모의한 것이다. 김덕문이 미군 화차의 차장과 기관사를 만난 곳은 서울역 앞 종착역다방이었다. 장물 운반은 김덕문이 군 기관에 부탁하였다.
주범 김덕문과 그의 처 김혜숙이 12월 30일 밤 강원도경에 의해 검거되었다. 주범 김덕문은 허동순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서울 압송 도중 삼각지에서 도망쳤었다는 것이 알려져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도망이 아니라 연루된 경찰이 일부러 놓아준 정황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967년 1월 1일 <동아일보> 신년 특집 사회면에 주범 부부의 사진과 함께 이 사건의 시말이 크게 보도되었다. 같은 신문 2면에 게재된 대통령 신년사에 실린 박정희 사진보다 이들 범인 부부의 사진이 더 컸을 정도로 열차 갱단 커피 탈취 사건은 세간의 관심사였다.
정부가 막을 수 없던 커피 인기
5.16 이후 단행된 특수외래물품 수입 및 판매 금지 조치의 여파로 언론에서의 커피 관련 보도는 확실하게 줄어들고, 이런 분위기는 5년이 지난 1966년까지 이어졌다. 1964년 1년간 보도된 커피 관련 기사는 연재 소설에 등장하는 커피 표현까지 합해도 166건에 그쳤고, 1965년에는 더 줄어서 107건에 불과하였다. 1966년에도 147건 수준이었다. 커피에 관한 전문적인 취재 기사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커피에 대한 언론의 무관심과는 달리 시민들 사이의 커피 유행과 다방의 인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단속과 규제를 강화하면 할수록 커피의 인기는 오히려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외래품 단속과 압수가 대단하였지만 대용커피를 파는 곳은 거의 없었고, 국산차를 마시기 위해 다방을 찾는 사람도 드물었다. 다방에서는 모두 진짜 커피를 팔고 있었고, 다방을 점령하고 있던 이 진짜 커피는 거의 다 미군 PX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부는 결국 손을 들었다. 1964년 7월 8일 <동아일보>는 경제기획원이 특정외래품 단속 범위를 축소하기로 결정하였고, 커피와 같이 국내 생산이 불가능하고, 실질적으로 단속할 수 없는 품목은 양성화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양성화란 수입을 허용한다는 의미였다. 8월 1일 <조선일보> 또한 정부가 커피의 수입을 허용하는 문제를 검토 중이라고 보도하였다.
<경향신문>은 9월 25일 기사를 통해 정부가 커피 자유 판매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브라질에서 우리나라 사과를 수입해가는 것을 조건으로 브라질 커피를 수입해 온다는 이른바 구상무역이 추진되고 있다는 흥미로운 소식이었는데 브라질은 이 뉴스를 부인하였다. 결국 정부는 9월 26일 커피를 특정외래품 판매 금지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의결하였다. 10월 4일 상공부에서 커피를 수입금지 품목에서 공식적으로 삭제하였다.
이후 커피는 수입쿼터제를 통해 정식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1964년 4/4분기에는 커피 5만불, 1965년 1/4분기에도 5만불의 커피를 수입하도록 승인하였다. 수입이 승인되는 것은 완제품 커피가 아니라 원료인 생두였다.
그런데 복잡한 승인 과정을 거쳐 정식으로 수입된 생두가 국내에서 가공되어 시중에 흘러나왔지만 인기가 없었다. 미군 PX를 통해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커피와의 경쟁에서 밀렸던 것이다. 당시 커피생두를 로스팅하는 전문가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졸속 행정이 만든 참담한 결과였다. 커피생두 수입은 거의 끊겼다.
커피 1천여 상자를 실은 미군 트럭이 잠적하는 사건(1965년 3월 12일)이 벌어지고, 가짜 커피를 미제 커피로 속여 팔다 적발되는 사건(1965년 1월 14일), 미군 PX에서 빼낸 커피 150상자를 불광동 산속에 숨겨두고 시중에 팔아온 혐의로 미군 PX 종업원 박모씨 등 4명이 검거되는 사건(1965년 11월 10일) 등 진짜 커피를 둘러싼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수필가 김소운의 표현대로 제주의 3다(많은 多)가 바람, 돌, 여자라면 서울의 3다는 사장, 기원, 다방이었다. 황실다방, 황제 다방 등 거룩한 이름부터 별다방, 솔다방, 역전다방 등 흔한 이름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름의 다방이 등장하였다. 도보 5-6분 거리에 이름이 서로 같은 다방도 등장할 정도였다.
커피 수입 '전면자유화' 결정
흥미로운 커피 뉴스도 점차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조선일보> 1965년 3월 11일 자 광고에는 순브라질 커피만을 파는 음악감상실 '카페-아카데미'가 아카데미극장 옆에 등장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대학생 이상만 입장할 수 있었다.
온양에서 커피체리를 생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향신문> 1965년 4월 30일 자는 온양읍에 사는 이모씨가 1962년 한미재단의 주선으로 취코리(무우형태의 커피종류)종 커피 재배를 시작하여 성공했다고 전했다. 심지어 인도 정부로부터 연간 7백 톤의 커피를 수입하겠다는 제안을 받아, 연간 30만 달러의 외화 획득이 가능하다는 흥분되는 소식도 전해졌다. 물론 이는 우리가 아는 쌈 채소이며 대용커피의 재료인 치커리의 재배 소식이 와전된 것이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고, 거리는 시민들의 반대 데모로, 국회는 야당의 인준 반대로 소란스러웠다. 8월 9일 국회의장 이효상이 아이스커피 한 모금으로 목청을 적셔가며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해방 20주년을 하루 앞둔 8월 14일 야당의 퇴장 속에 비준안은 국회를 통과하였다.
1966년 6월에는 커피 분쇄기, 즉 그라인더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는 보도가 있었고, 1966년 6월 25일 김기수가 벤베누티를 이기고 프로복싱 세계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올랐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인 최초였다. 김기수의 코치인 리처드 바비가 하루에 커피 20잔 정도를 마신다는 뉴스, 자바섬에서 커피농장을 지키는데 호랑이를 사용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서서히 커피 관련 뉴스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상공부는 1966년 11월 30일 커피 수입을 전면 자유화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동아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1964년~1966년 기사.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이길상, 2021).
▲ <경향신문> 1966년 12월 16일 자 사회면 기사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1966년 12월 16일, 당시 커피 유행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져 중앙 일간지들이 연일 대서특필하였다. <경향신문> 1966년 12월 16일 자 사회면 기사의 제목은 '달리는 열차에 갱, 범인도주'였고, 함께 실린 사진의 설명문은 '갱단이 열차에서 꺼내 던진 미제 커피 100상자'였다.
이 신문에서 보도한 사건의 전모는 이러했다. 12월 15일 0시 55분쯤 서울발 부산행 제61호 미군 전용 정기 화물열차가 충남 대덕군 회덕리 북쪽 1500미터 지점 언덕바지를 달릴 무렵 갱단이 화물차에 올라타 문을 부순 후 미군 보급품인 커피 1백 상자를 철로 변에 꺼내 던지고, 화차 10량을 분리시켜 털려다 동 화물열차 뒤를 달려오던 목포행 33열차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범인들은 모두 도주하였다.
<동아일보>는 미리 타고 있던 갱들이 10량의 화차를 분리시켜 다량의 군수물자를 훔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보도하였다. 범행 장소에 빼돌린 커피 상자를 옮길 트럭이 대기했던 흔적으로 미루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대규모 갱단의 범행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벌어진 지 8일이 지난 12월 23일 밤 경찰은 해당 열차의 차장 이모씨 등 3명을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하고, 주범 중 1명인 허동순을 체포하여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발표하였다. 또 다른 주범인 김덕문과 그의 처 이외에 모두 검거하였는데 이들은 이미 9월 21일에도 같은 열차에서 같은 수법으로 미제 커피 40상자를 훔쳐낸 것으로 밝혀졌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 <경향신문>은 이 사건을 다시 보도하면서 이 사건에는 미군물자상습절도단이 개입하였고, 경찰이 잡힌 범인을 놓아주었으며, 군 기관원이 이들과 연락이 되어 현장에 나타났고, 철도직원이 가담하여 열차를 정지시켜준 사실을 보도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조선일보>도 12월 27일 자에 '부평 모의에서 회덕 범행까지-열차갱 그 전모, 마치 서부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사건의 모의부터 실행까지를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이들이 사건을 모의한 아지트, 공범을 만난 장소 모두 다방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부평 D다방이 이들의 아지트였다. 추석에 미군열차에서 커피 46상자를 털어먹어 재미를 본 허동순, 김덕문 등이 또 다른 범행을 모의한 것이다. 김덕문이 미군 화차의 차장과 기관사를 만난 곳은 서울역 앞 종착역다방이었다. 장물 운반은 김덕문이 군 기관에 부탁하였다.
주범 김덕문과 그의 처 김혜숙이 12월 30일 밤 강원도경에 의해 검거되었다. 주범 김덕문은 허동순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서울 압송 도중 삼각지에서 도망쳤었다는 것이 알려져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도망이 아니라 연루된 경찰이 일부러 놓아준 정황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967년 1월 1일 <동아일보> 신년 특집 사회면에 주범 부부의 사진과 함께 이 사건의 시말이 크게 보도되었다. 같은 신문 2면에 게재된 대통령 신년사에 실린 박정희 사진보다 이들 범인 부부의 사진이 더 컸을 정도로 열차 갱단 커피 탈취 사건은 세간의 관심사였다.
정부가 막을 수 없던 커피 인기
5.16 이후 단행된 특수외래물품 수입 및 판매 금지 조치의 여파로 언론에서의 커피 관련 보도는 확실하게 줄어들고, 이런 분위기는 5년이 지난 1966년까지 이어졌다. 1964년 1년간 보도된 커피 관련 기사는 연재 소설에 등장하는 커피 표현까지 합해도 166건에 그쳤고, 1965년에는 더 줄어서 107건에 불과하였다. 1966년에도 147건 수준이었다. 커피에 관한 전문적인 취재 기사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커피에 대한 언론의 무관심과는 달리 시민들 사이의 커피 유행과 다방의 인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단속과 규제를 강화하면 할수록 커피의 인기는 오히려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외래품 단속과 압수가 대단하였지만 대용커피를 파는 곳은 거의 없었고, 국산차를 마시기 위해 다방을 찾는 사람도 드물었다. 다방에서는 모두 진짜 커피를 팔고 있었고, 다방을 점령하고 있던 이 진짜 커피는 거의 다 미군 PX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 <경향신문> 1964년 9월 25일 자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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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결국 손을 들었다. 1964년 7월 8일 <동아일보>는 경제기획원이 특정외래품 단속 범위를 축소하기로 결정하였고, 커피와 같이 국내 생산이 불가능하고, 실질적으로 단속할 수 없는 품목은 양성화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양성화란 수입을 허용한다는 의미였다. 8월 1일 <조선일보> 또한 정부가 커피의 수입을 허용하는 문제를 검토 중이라고 보도하였다.
<경향신문>은 9월 25일 기사를 통해 정부가 커피 자유 판매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브라질에서 우리나라 사과를 수입해가는 것을 조건으로 브라질 커피를 수입해 온다는 이른바 구상무역이 추진되고 있다는 흥미로운 소식이었는데 브라질은 이 뉴스를 부인하였다. 결국 정부는 9월 26일 커피를 특정외래품 판매 금지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의결하였다. 10월 4일 상공부에서 커피를 수입금지 품목에서 공식적으로 삭제하였다.
이후 커피는 수입쿼터제를 통해 정식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1964년 4/4분기에는 커피 5만불, 1965년 1/4분기에도 5만불의 커피를 수입하도록 승인하였다. 수입이 승인되는 것은 완제품 커피가 아니라 원료인 생두였다.
그런데 복잡한 승인 과정을 거쳐 정식으로 수입된 생두가 국내에서 가공되어 시중에 흘러나왔지만 인기가 없었다. 미군 PX를 통해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커피와의 경쟁에서 밀렸던 것이다. 당시 커피생두를 로스팅하는 전문가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졸속 행정이 만든 참담한 결과였다. 커피생두 수입은 거의 끊겼다.
커피 1천여 상자를 실은 미군 트럭이 잠적하는 사건(1965년 3월 12일)이 벌어지고, 가짜 커피를 미제 커피로 속여 팔다 적발되는 사건(1965년 1월 14일), 미군 PX에서 빼낸 커피 150상자를 불광동 산속에 숨겨두고 시중에 팔아온 혐의로 미군 PX 종업원 박모씨 등 4명이 검거되는 사건(1965년 11월 10일) 등 진짜 커피를 둘러싼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수필가 김소운의 표현대로 제주의 3다(많은 多)가 바람, 돌, 여자라면 서울의 3다는 사장, 기원, 다방이었다. 황실다방, 황제 다방 등 거룩한 이름부터 별다방, 솔다방, 역전다방 등 흔한 이름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름의 다방이 등장하였다. 도보 5-6분 거리에 이름이 서로 같은 다방도 등장할 정도였다.
커피 수입 '전면자유화' 결정
▲ <조선일보> 1965년 3월 11일 자 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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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커피 뉴스도 점차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조선일보> 1965년 3월 11일 자 광고에는 순브라질 커피만을 파는 음악감상실 '카페-아카데미'가 아카데미극장 옆에 등장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대학생 이상만 입장할 수 있었다.
온양에서 커피체리를 생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향신문> 1965년 4월 30일 자는 온양읍에 사는 이모씨가 1962년 한미재단의 주선으로 취코리(무우형태의 커피종류)종 커피 재배를 시작하여 성공했다고 전했다. 심지어 인도 정부로부터 연간 7백 톤의 커피를 수입하겠다는 제안을 받아, 연간 30만 달러의 외화 획득이 가능하다는 흥분되는 소식도 전해졌다. 물론 이는 우리가 아는 쌈 채소이며 대용커피의 재료인 치커리의 재배 소식이 와전된 것이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고, 거리는 시민들의 반대 데모로, 국회는 야당의 인준 반대로 소란스러웠다. 8월 9일 국회의장 이효상이 아이스커피 한 모금으로 목청을 적셔가며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해방 20주년을 하루 앞둔 8월 14일 야당의 퇴장 속에 비준안은 국회를 통과하였다.
1966년 6월에는 커피 분쇄기, 즉 그라인더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는 보도가 있었고, 1966년 6월 25일 김기수가 벤베누티를 이기고 프로복싱 세계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올랐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인 최초였다. 김기수의 코치인 리처드 바비가 하루에 커피 20잔 정도를 마신다는 뉴스, 자바섬에서 커피농장을 지키는데 호랑이를 사용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서서히 커피 관련 뉴스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상공부는 1966년 11월 30일 커피 수입을 전면 자유화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동아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1964년~1966년 기사.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이길상,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