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용이 승천했다는 신비한 협곡...'뽀드득' 500년 소나무길 거니는 '겨울 울진'[디깅 트래블]

쫓겨난 용이 승천했다는 신비한 협곡...'뽀드득' 500년 소나무길 거니는 '겨울 울진'[디깅 트래블]

⑨거장·거목·거창한 절경이 녹아든 경북 울진
만화로 지역 살린 매화면 이현세 만화거리마을
흰색 울퉁불퉁 협곡서 만난 왕피천 용소의 절경
금강소나무 서식지서 만난 '500년 소나무'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 돌풍을 이어가는 가운데, 그 시절 우리가 봄을 잃고 맞은 군사정권은 문학, 미술, 영화는 물론 만화까지 글자 하나하나를 검열하며 창의력 말살에 앞장섰다. 이때 등장한 이현세, 허영만, 황미나, 김수정 등 많은 작가는 대한민국 만화를 예술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선구자들로 기억된다. 이들의 작품은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애니메이션을 넘어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돼 지금까지도 대중의 기억에 살아 숨 쉬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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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군 매화면 이현세만화거리에 그려진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들. [사진제공 = 울진군]
공포의 외인구단, 남벌 등 작품이 마을 곳곳에…'울진군 매화면 이현세 만화거리마을'

그중에서도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된 1986년 작 '공포의 외인구단'의 이현세 작가는 2012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각계 전문가 100명과 독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만화 선호도 조사에서 1위에 선정될 만큼 꾸준한 인기를 자랑한다. 그 기억을 현재로 잇고자 이 작가의 고향으로 알려진 경북 울진군 매화면은 그가 창조한 캐릭터를 마을 벽 곳곳에 채워나가 2017년 '이현세 만화거리마을'을 만들었다.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대게' 못지않게 이현세를 추억하며 매화면을 찾아 그 시절 추억을 회상하면서, 이 지역이 새로운 관광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울진군 매화면은 이현세 작가의 고향으로 알려졌지만, 때마침 울진 웹툰영화제 행사로 이곳을 찾은 이 작가에게 직접 물으니 "부친의 고향"이란 답이 돌아왔다. 이 작가는 포항에서 태어났고 경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부친과 친척 일가가 모두 매화면에 살아서 사실상의 본적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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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매화면에서 개최된 울진웹툰영화제 현장을 찾은 이현세 작가. [사진 = 김희윤 기자]

지역의 많은 소도시가 그렇듯 매화마을 역시 인구 감소로 지역 소멸 위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때마침 대구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황춘섭 매화1리 이장은 '이러다 고향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마을을 살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하던 중 이곳 출신의 이현세 작가의 만화를 벽화로 옮겨 관광 자원화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황 이장과 주민들은 마을에 거주 중인 이 작가의 친척을 수소문해 서울로 찾아가 직접 작가를 설득한 끝에 이현세만화거리를 조성했다.

마을 곳곳에는 작가의 대표작 ‘공포의 외인구단’을 비롯해 ‘남벌’, ‘며느리밥풀꽃’, ‘만화 삼국지’ 등 그의 대표작에 등장하는 400컷의 그림이 1km의 담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마을 어귀에 열차를 개조한 '남벌열차카페'도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고요했던 시골 마을은 이 작가 작품에 향수를 가진 세대부터 레트로한 취향의 젊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차츰 이어지면서 지역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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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왕피천 용소 전경. [사진 = 김희윤 기자]
왕피천 용소, 흰색의 울퉁불퉁 협곡에서 만난 인생 절경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여행지를 물색하다 이윽고 왕피천을 떠올렸다. '왕이 피신한 곳'이란 뜻의 지명만큼 접근이 쉽지 않지만, 최근에는 ‘왕피천 유역 둘레길’을 조성돼 구석구석을 차분히 살펴볼 수 있다. 총 길이 51.7km의 둘레길은 7개 구간으로 구성돼있는데, 그중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험난한 길을 자랑하는 굴구지마을-용소 샛길을 선택했다.

용소(龍沼)는 흰색의 울퉁불퉁한 바위 협곡으로 왕피천에서 가장 폭이 좁고 소(沼)가 깊은 곳이다. 과거 불영사를 창건할 때 연못에 살던 용을 쫓아내고 절을 지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왕피천에 들어와 용소에서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용소 가운데 입을 벌린 용머리는 장정 다섯 명이 들어가는 크기로 굴 안에 물이 고여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옛 조상들은 이 지역을 신성한 곳을 여겨 사람이 지나다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힘들게 온 보람 이상의 절경이 모든 피로를 씻겨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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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금강소나무숲길 7구간에 자리한 500년 소나무. [사진 = 김희윤 기자]
국내 최대 금강소나무 서식지서 만난 '500년 소나무'

지난해 3월, 울진은 화마에 휩싸여 큰 고초를 치렀다. 역대 최대 규모의 산불 앞에 인간은 너무도 무력했고, 열흘간 총 2만923㏊를 태운 끝에 겨우 불씨를 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 소방 당국과 산림 당국이 최후의 방어선 사수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덕에 금강소나무 숲은 1구간 일부를 제외하고는 화마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울진 금강소나무숲은 조선 숙종 때부터 일반인의 접근을 막고 국가가 숲을 관리한 자원이자 보호지역이었다. 숲길을 따라 올라가다 마주한 오른편의 큰 돌에는 일반인은 접근하지 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황장봉산봉계표석’을 넘어가다 발각되면 곤장 100대의 중형에 처할 만큼 금강송(황장목)은 왕실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 소나무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울진 금강소나무길은 모두 7구간으로 길이는 각각 10~15km에 이른다. 그중 500년 소나무가 있는 길은 마지막 7구간 ‘가족탐방길’로 총 길이 5.3km로 어린아이들도 천천히 걸으면 충분히 함께할 수 있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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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금강소나무숲길 안내판. 총 7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 = 김희윤 기자]

500년 소나무는 저 높은 곳까지 뻗어 올라 세상을 굽어 내려다보며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다. 가지도 정리하지 않았다. 금강송이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그게 대수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나무의 자태에 관람객들의 발걸음은 모두 그 앞에 멈춰서기 마련이다.

금강소나무 생태관리센터에서 출발해 500년 소나무-못난이 소나무-미인송-금강소나무 군락지 전망대를 거쳐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는 특히 가을에 인기가 많지만, 눈 내린 겨울에도 산속의 고요한 정취와 함께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선호도가 높다고 관계자는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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